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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조현병에는 이유가 있었다…“정의 회복 프로젝트”

식민, 전쟁, 성폭력, 이민자 차별 등 겪은 어머니의 생애 탐구한 <전쟁 같은 맛>
등록 2023-06-23 22:30 수정 2023-06-29 10:32

한국전쟁 시기, 분유는 국제사회가 한국으로 가장 많이 보낸 물품 가운데 하나였다. 전쟁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는 대다수 한국인에게 분유는 중요한 영양소 공급원이었다. 분유를 물에 타서 끓인 죽은 살아남으려면 먹어야만 했다. 비록 한국인 10명 가운데 5∼7명이 유제품에 든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부족해 탈이 나더라도. 50여 년이 흐른 뒤 저자 그레이스 M. 조의 어머니는 “그 맛은 진절머리가 나. 전쟁 같은 맛이야”라고 말한다. 음식을 거부하는 자신을 위해 가족이 마련한 식량 가운데 분유엔 손도 대지 않는 이유를 짐작게 한다.

<전쟁 같은 맛>(글항아리 펴냄)은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계, 전쟁, 성폭력, 이민자 차별 등을 겪다 조현병이 발병하고 2008년 숨진 어머니의 생애를 탐구한다. 어머니의 발병에 단순히 생물학적 요인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무수한 폭력을 가한 한국과 미국 사회도 중요한 원인이었음을 드러낸다.

글쓴이의 어머니 ‘군자’는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저자의 외조모부 가운데 한 명이 강제 동원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오빠는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아버지와 언니는 제때 치료받지 못해 위암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국내 미군이 주둔하던 기지촌에서 성매매 여성으로 종사하며 실질적 가장 역할을 했다. 혼외 관계에서, 그것도 외국인 남성의 아이를 낳은 어머니가 한국 땅에서 발붙일 곳은 마땅치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손님이던 미국인 상선 선원과 결혼해 1972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워싱턴주 셔헤일리스 지역에 정착한 최초의 아시아인으로서, 어머니는 배타적인 농촌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숲에서 채집한 블루베리를 팔거나, 파이 등 디저트를 만들어 나눠주고, 마을 구성원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며 미국 사회에 익숙해지려 한다. 선원이라 1년의 절반은 나가 있는 아버지 대신 가사와 자녀 양육을 도맡는 동시에 야간노동 등을 병행하면서다. 1986년 열다섯이던 저자는 어머니의 정신 이상을 알아차렸지만, 당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과 무지로 조기에 치료할 기회를 놓친다. 환청과 망상 등을 겪는 어머니는 집 안으로 은둔하며 때로는 식사도 거부한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상실의 슬픔을 글쓰기로 달래보려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이 책은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닮은 사람들을 기리고 애도하는 데 실패한 한·미 사회에 대한 정의 회복 프로젝트”라고 표현했다.

21이 찜한 새 책

가부장 자본주의

폴린 그로장 지음, 배세진 옮김, 민음사 펴냄, 1만8천원

성별 간 임금·고용률 격차의 감소폭은 1980년대 이후 답보 상태다. 여성은 첫 자녀를 출산하면 이전 해보다 약 60% 적은 돈을 벌게 되며 이후 이 격차를 따라잡지 못한다. 남편보다 소득이 더 많은 유자녀 여성은 무자녀 여성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사에 할애한다. 여성이 집안일을 맡아야 한다는 문화적 규범 탓이다. 저자는 이런 ‘가부장 자본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쉬운 해결책

제시 싱걸 지음, 신해경 옮김, 메멘토 펴냄, 2만5천원

자존감, 그릿(열정이 있는 끈기), 넛지(부드러운 개입), 무의식의 힘 등 행동과학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후속 연구는 놀라울 만치 과학적 근거가 빈약했음을 밝혀냈다. 그럴듯해 보이는 유사 행동과학은 사회구조와 체계에서 비롯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허리케인 도마뱀과 플라스틱 오징어

소어 핸슨 지음, 조은영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1만8500원

급속한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생물들의 먹이와 성격, 형질이 변한다. 이상 기후를 피하기 위해 나무조차 서식지를 옮기고, 새는 짝짓기에 드는 에너지를 아끼려 깃털 크기를 줄이고, 물고기는 물속에서 더는 춤추지 않는다. 대다수 생물이 빠른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다. 저자는 한 종으로서 인간의 행동 변화를 촉구한다.

미쳤다는 것은 정체성이 될 수 있을까?

모하메드 아부엘레일 라셰드 지음, 송승연·유기훈 옮김, 오월의봄 펴냄, 2만9천원

현대 보건의료체계는 광기를 병리화한다. 질환이나 증상이라는 틀에 가두어 단순히 정신과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매드(Mad) 정체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를 전복한다. 광기는 자기 특성을 드러내는 정체성이며, 이런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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