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콘텐츠 시대입니다. 아이티(IT) 기업과 반도체 설계 기업 등 최고 수준의 디지털 기업이 제주에서 활약하고 세계의 인재들이 제주로 모여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입니다.”
올해 제주 4·3 대통령 추념사를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자리에서 저렇게 말해도 되나? 대통령이 오지 않고 국무총리가 대독했다는 사실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한참을 착잡해하다, 문득 저 기상천외한 발언이 어쩌면 그리 낯선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의 기억을 개발로 덮는 방식이야말로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을 특징짓기 때문이다.
김아람의 <난민, 경계의 삶>은 비극이 만들어낸, 그리고 비극을 메워나간 난민들에 주목한다. 우리는 ‘난민’ 하면 인종과 종교, 문화가 다른 이방인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국민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동에 휩쓸린 존재라면 모두 난민이다. 그 점에서 20세기 한반도는 난민의 집합소였다.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의 분단, 이어진 전쟁으로 귀환민과 월남민, 피란민 등 수많은 사람이 고향을 잃고 흩어졌다.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에서 알 수 있듯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토벌’하며 수많은 난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폐허에서 탄생한 난민을, 국가는 폐허가 된 땅에 심었다. 문자 그대로의 ‘식민’(植民)이었다. 제주의 경우 4·3항쟁과 한국전쟁이 겹치며 현지인과 월남민, 피란민 정착촌이 만들어졌다. 1950년대까지는 주로 월남민과 피란민을 대상으로 정착사업이 이루어졌다면, 1960년대부터는 도시 부랑인과 고아, 걸식자도 ‘수집’당해(당시 공식 표현이다!) 농촌개발에 동원됐다. 1960년대 신문과 뉴스에 빈번히 등장하는, “개척단원”과 “윤락여성”의 합동결혼식은 정착사업이 국토 재건과 사회의 ‘명랑화’를 동시에 도모하는 이중의 기획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게 난민은 식민을 거쳐 국민이 되어갔다.
최근 한국에서 난민이 전례 없이 주목받는 가운데, 이 책은 얼핏 우리 모두 난민이었다는 ‘안전한’ 결론을 이끌어내기에 제격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말은 그러니 우리 모두 기꺼이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착한’ 결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지은이가 정확히 지적했듯, 국가는 난민이 발생한 근본적 이유를 외면한 채 난민에게 스스로 정착해야 한다는 책임만 부여했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국가 앞에서, 난민은 자활을 통해 개발에 이바지했음을 보여줘야만 비로소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는 분명 주체적이고 역동적인 성취였겠으나, 동시에 그러지 못한 이들을 배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우리 모두 난민이었다는 말은, 대한민국이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고자 분투해온 사람들에 의해 건설됐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제목이 말해주듯 난민의 삶이란 국가가 정한 통치의 경계, 개척이라는 경제적 경계, 배제와 차별이라는 사회적 경계를 넘어 국민이 되고자 했던 노력과 좌절의 역사다. 누군가는 이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원동력으로 평가하겠지만, 4·3조차 “디지털 기업”과 연결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쓸모주의’ 역시 여기서 출발했다.
다음달 울산에 간다. 학과 차원에서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자녀들의 멘토링을 지원하기로 했다.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이 건설한 역설적인 국가에 뿌리내릴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책을 읽으면 조금 뚜렷해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더 복잡해진 기분이다.
유찬근 대학원생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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