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玉)아! 나는 너의 아부지란다. 너는 나의 얼굴을 기억도 못할 것이다. 너도 지금은 6학년이라지. 퍽 컸겠구나! 내가 집을 떠날 때에는 너 나이 다섯 살이었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지 다섯 살 먹은 성옥이의 얼굴만 눈앞에 떠오른다.”1
아빠 이관술은 어린 딸에게 편지를 썼다. 감옥에서 쓴 편지였다. 편지 겉봉에는 발신자 주소를 ‘경성부 현저정 101번지’라고 기재한 보라색 스탬프 자국이 뚜렷했다. 서대문형무소의 주소였다. 그 스탬프는 서신을 검열하는 형무소 관리가 눌렀음이 틀림없다. 겉봉에는 연필로 쓴 검열 의견이 남아 있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어(일본어)로 쓰라. 조선어는 인정하지 않음”이라고 적혀 있다. 검열관의 필적이었다. 하마터면 딸에게 보낸 편지가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편지가 쓰인 때는 1943년 5월9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전시 체제에서 국어상용운동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는 시국에 비춰볼 때 조선어로 쓴 편지는 허용될 수 없었다. 마땅히 불허 처분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어린 딸에게 보낸 편지라서 한번 눈감아줬을까? 어쨌거나 이 편지는 무사히 형무소 밖으로 배달된 것 같다. 그의 유족은 오늘날까지도 이 편지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옥아!” 아빠는 딸을 이렇게 불렀다. 집안 아이를 친근하게 부를 때 이름 끝 자만 떼어 부르는 경상도식 호명이었다. 본명은 성옥이었다. 별 성자, 구슬 옥자, 이성옥(李星玉)이었다.
옥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그 아이 다섯 살 때였다. 이성옥의 생년월일이 1931년 3월1일이므로, 1935년 어느 때였다. 태어난 해를 한 살로 치는 조선식 나이 계산법이 널리 사용된 시절이었다. 도대체 왜 다섯 살 난 어린아이를 두고서 아빠는 먼 길을 떠났을까? 옥이뿐만이 아니었다. 젊은 아내 박가야(34)가 있었고 어린 세 딸 이정환(8), 이성옥(5), 이정성(3)이 올망졸망 자라나고 있었다. 게다가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아빠의 손길이 간절한 가정이었는데도 그는 집을 떠나야 했다.
처음이 아니었다. 이관술이 가족 곁을 처음 떠난 때는 1933년 1월29일이었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지리⋅역사 교원이던 그는 ‘여러 학교 학생층을 망라한 독서회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됐다.2 검거자는 속속 늘었고 사건은 점점 확대됐다. 결국 그해 3월11일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해 경성의 공장과 학교들 속에서 저항운동을 벌인 죄로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세포 조직 수가 13개에 이르고 송치된 연루자만도 43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 첫 번째 옥고였다.
그는 이듬해 4월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병보석이란 구류 중의 미결수가 심각한 질병에 걸렸는데 형무소 내 의료진이 관리하기 어려울 때 법원 판단으로 석방하는 절차를 가리킨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 사상범에게는 아주 드물게밖에 적용되지 않았다. 그로 미뤄보면 이관술은 체포 이후 취조받는 과정에서 건강이 크게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출감한 그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257번지 자택으로 돌아가 건강 회복에 힘썼다. 이때 아내와 아이들이 함께 지냈던 것 같다.
다섯 살 옥이와 이별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정양에 힘쓰던 그는 초가을부터 경성을 오르내리더니, 마침내 또다시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1935년 1월께였다. 뒷날 이관술은 당시 심정을 회고하기를, “동지가 그립고, 일본 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했다고 한다.3 그때 품었던 격한 심정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다고 술회했다. 요컨대 이관술의 상경 목적은 반일 저항운동을 계속하기 때문에였다. 공공선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워낙 절실했기에 집안일을 미처 돌볼 수 없었다.
그때 이후로 6년이 지났다. 비밀결사운동에 전념한 이관술은 경성에 16개, 인천과 함경남북도에 걸쳐서 그에 필적하는 규모의 세포단체를 조직하는 데 성공했으나, 1941년 1월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저 유명한 ‘경성콤그룹 사건’의 수모자로 지목돼, 생애 두 번째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다섯 살 옥이는 그새 열세 살이 됐다. 국민학교 6학년생으로 자랐다. 1941년 ‘국민학교령’이 시행된 뒤 과거에 보통학교, 소학교로 부르던 초등 교육기관이 모두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이제 어린아이 태를 벗고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연령이었다. 그러나 이관술은 청소년기에 접어든 딸의 모습을 그리기 어려웠다. 헤어질 당시 다섯 살 먹은 성옥이의 얼굴만 눈앞에 떠오를 뿐이었다.
“너가 서대문으로 보내준 편지를 읽었다. 그 뒤 무엇이라고 답장을 하려는 것이 이렇게 늦었단다. 옥아. 상급학교에 보내달라고 했지? 너의 아부지는 그런 것을 모른단다. 모두 다 너의 어무니에게 맡겼단다. 어무니에게 여쭈어봐라. 그리고 어무니라든지 작은아부지라든지 할아부지의 훈계하는 말을 잘 들어야만 한다. 자주 편지 보내다고. 아부지는 이제야 새삼스럽게 집안일들이 궁금하단다.”4
이관술은 딸에게 답장을 써야 했다. 성옥이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아빠에게 편지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그리운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그래도 편지를 쓸 수 있으니 든든했으리라. 딸은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다고 졸랐다. 감옥에 갇힌 아빠에게 그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진학에 대한 내면의 욕구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관술은 면목이 서지 않았다. 천하사에 헌신하느라 가사를 돌보지 않은 지 오래였다. 아우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10년 동안 부모 친척 가사(家事) 불고(不顧)하고 다니던 나로서 (집안일을) 안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효용이 있으랴마는”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이제 와서 딸아이의 상급학교 진학 뒷받침 여부를 판단하거나 허락할 형편이 아니었다. 어떻게 답장해야 할까,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관술은 딸에게 말했다. “너의 아부지는 그런 것을 모른단다”라고 솔직히 토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어머니, 작은아버지, 할아버지의 말을 따르라고 답했다.
아버지 이관술의 고뇌가 느껴진다. 계급 철폐와 피억압 민족의 해방에 더해 여성해방의 진보적 가치관을 지닌 사회주의자이지 않은가. 아들에 비해 딸의 교육 기회에 차등을 주던 관습에 맞서온 그였다. 평소 같으면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마땅히 지지하고 고무했을 터인데, 그는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관술의 생각으로는, ‘작은아부지’와 ‘할아부지’의 존재 덕분에 아내 박가야가 올망졸망 네 딸을 거느리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작은아부지’란 아우 이학술(33)을 뜻했다. 9살 어린 동생이지만 장남인 자신을 대신해 집안 대소사를 주관했다. ‘할아버지’란 자신의 부친 이종락(李宗洛)을 가리키는데, 안타깝게도 전년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중소 지주로서 궁핍하지 않은 살림살이를 하는 부친과 아우의 조력이 있다면, 아내의 생활과 어린 딸들의 양육은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래도 가족의 안전과 생계가 걱정스러웠다. 집안일들이 궁금하니 자주 편지를 보내달라고 어린 딸에게 말한 것은 아이가 귀여워서도 그랬겠지만, 내면의 본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관술의 가족은 그 뒤 어떻게 살았을까? 막내딸 이경환이 남긴 기록이 있다. 1935년 초 아버지가 가족을 남겨두고 집을 떠날 때 엄마 배 속에 들었던 그 아이 말이다. 뒷날 그는 아버지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요청하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5
막내딸이 평생에 딱 한 번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이관술이 1943년 12월20일자 구류 집행 정지 결정에 따라 고향 집에 체류하던 때를 가리킨다. 중태에 빠진 수감자를 가족에게 맡겨 치료하도록 하는 세키후(責付) 제도가 적용됐기 때문이다. 출옥 기간은 3개월이었다. 날마다 순사가 방문해 소재를 확인했다. 이듬해 3월 말 기한이 만료되자 형무소에 재수감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이관술은 기한이 만료되던 날 명령을 어기고 탈출했다. 소재지를 이탈해 다시 저항운동의 일선으로 복귀했다. 지치지 않는 놀라운 투혼이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일본 순사들이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 자택에 진을 치고 추적 수사에 열을 올렸다. 막내딸은 아홉 살 때 겪은 그 정황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3개월 동안에도 아빠에게 재롱 한번 마음껏 부리지 못한 것이 오래도록 한스러웠다.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문헌
1. 이관술, ‘(옥중편지) 李鶴述殿’, 1943년 5월9일
2. ‘李觀述 피검, 학생층 독서회 관계’, <매일신보> 1933년 1월30일
3. 李觀述, ‘반일지하투쟁의 회상(중) 이재유씨와의 연락’, <현대일보> 1946년 4월18일
4. 이관술, 앞의 편지
5. 이경환, ‘판사님께’, 2013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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