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되지 않은 거물’이라고 불렀다. 이재유와 함께 비합법 혁명운동을 이끌던 이관술(35)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하에서 ‘암약’하는 반일운동의 뿌리를 뽑으려 들던 경찰은 1936년 12월25일 개가를 올렸다. 지하운동의 우두머리로 간주하던 이재유를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다. 이재유와 함께 한 형제처럼 기거하면서 반일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던 그자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경찰은 수사의 초점을 한군데로 집중했다. 바로 이관술이었다. 그를 가리켜 “이재유에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라고 지목했다. 경기도경찰부는 지명수배령을 내리고 산하 각 경찰서와 긴밀한 연락체계를 구축해 그의 행방을 뒤쫓았다. 그러나 몇 달이 되도록 자취를 찾기 어려웠다. 혹시 수사망을 피해 국경 너머 만주로 도주한 것이 아닐까, 경찰 기록에는 그런 추측도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추측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관술의 소재가 포착됐다. 자취를 감춘 지 7개월 만이었다. 그는 국외로 도주한 게 아니라 조선 내지를 버젓이 활개 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성 시내 한가운데서 그러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1937년 7월19일 밤 “여의도비행장 부근에서 영등포경찰서원이 때마침 그곳에서 동지와 연락을 취하고 있던 이관술이를 발견”했다. 경찰은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아서 그만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1
경찰은 발칵 뒤집혔다. 경성 시내 각 경찰서는 긴장한 빛을 띠고 맹렬히 이관술의 행방을 추격했다.
경기도경찰부가 작성한 수사보고서가 남아 있는데, 거기에는 여의도 사건의 정황이 적혀 있다. 경성비행장에는 군용기가 빈번히 왕래하기 때문에 그곳을 관할하는 영등포경찰서 외근 순사가 엄중히 경계하는 중이었다. 그날 순사는 수상한 남녀가 부근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검문을 시도했는데, 남자는 지니고 있던 우산과 맥고모자를 내버린 채 어두운 밤을 틈타 빽빽이 자란 갈대밭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고 수사보고서에 쓰여 있다. 다행히 뒤늦게 도주하던 여자를 체포할 수 있었다. 취조 결과 여자는 불과 나흘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형기를 채우고 출옥한 이순금(25)이었다. 그는 이관술의 누이동생이지 않은가? 경찰은 같이 있던 남자가 누구인지 추궁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체포 뒤 이틀이 지난 시점까지도 ‘전혀 알지 못하는 동지’라고 거짓으로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도주한 그자가 곧 이관술이리라 판단했다.2
그랬다. 이순금이 보호하려고 애쓴 남자의 신원은 이관술이었다. 10살 더 많은 배다른 오빠 이관술은 그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은사이기도 했다. 뒷날 이순금이 작성한 회고 기록에 따르면, 오빠는 삼베 고의적삼을 입은 농부 차림을 하고서 삽을 둘러메고 왔다. 변장한 옷차림이 너무 자연스러워 이순금은 멀리서는 그를 잘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오빠는 감옥에서 막 나온 누이동생의 안부를 묻고는 곧이어 투쟁을 화제에 올렸다. 이순금은 그런 태도에 섭섭한 마음이 들기는커녕 이관술의 ‘위대한 혁명가의 면목’을 더한층 느꼈다고 한다.3
얘기 도중 소낙비가 왔다. 장대같이 쏟아졌다. 잠깐 얘기하는 중인데도 한강 수위가 급격히 상승했다. 한강 물이 불어난 탓에 영등포 방면으로 난 소로가 물에 잠겼다. 그날 일기예보를 보자. 저기압이 산둥반도에서 동쪽으로 움직이고, 그날 밤에는 비가 올 것이라고 예고됐다. 비가 왔기 때문인지 경성 최고기온은 29.5도였다. 한여름인데도 높지 않은 편이었다.4
어떻게 해야 할까. 예기치 않은 상황 변화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비가 잦아지면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만 여의도파출소 순사들에게 의심을 사고 말았다. 두 사람은 파출소로 연행됐다.
점점 밤이 깊어갔다. 오빠가 은밀하게 속마음을 전해왔다. 그곳을 탈출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순금은 물이 너무 많아서 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고 걱정했다. 귀신이라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말렸다. 하지만 오빠는 ‘비장한 결심’을 토로했다. 그는 결국 밤이 깊어서 순사들이 잠든 틈을 타서 파출소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이순금은 또다시 오빠와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했다.
이순금은 걱정스러웠다. 캄캄한 밤! 장대 같은 소낙비! 산더미 같은 격랑! 이 모든 것을 뚫고 한강 물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추적을 피하려면 영등포 방면의 좁은 물길이 아니라 마포 방면의 넓은 물로 나아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하나. 오랜 비합법 생활로 체력도 약해진 것 같은데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를 물었다.
이관술도 여의도에서 겪은 위기에 대해 뒷날 회고록을 남겼다.5 그에 따르면 여동생과의 접선을 매개한 사람은 박진홍(23)이었다. 동덕여고보 제자이자 노동운동 동지이기도 한 그는 용산적색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돼 두 번째 감옥살이를 마치고 두 달 전 출감했다. 이관술은 출옥한 미전향 동지들을 규합해 다시 건설하려는 조직의 근간으로 삼았다. 박진홍과 이순금을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박진홍이 이관술과 접선한 곳은 노량진이었다.6
그때 이관술은 방물장수로 변장하고 다녔다. 방물장수란 시골 여성용 화장품과 바느질 도구, 장식품과 패물 따위를 궤짝에 넣고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판매하는 행상을 가리킨다. 이관술도 그랬다. 이재유가 체포된 뒤 6개월 동안 방물장수로 강원도와 경상도 농촌 지대를 전전했다고 한다. 차림새는 여름용 고의 바지와 반팔 등거리 적삼 차림에 맥고모자를 썼고 등에는 궤짝을 짊어진 모습이었다. 전형적인 방물장수 생김새였다. 그는 궤짝에서 화장품, 실, 바늘, 빗 같은 부인용 잡화를 하나씩 꺼내더니 박진홍에게 선물이라고 건네주었다. 그는 출옥한 지 얼마 안 된데다 그런 물건도 귀한 때였으므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길거리에서 파는 3전짜리 우동을 한 그릇씩 사먹으며 조직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신문기자 월급이 70원이고 버스 차장의 일당이 75전 하던 시절이므로, 3전짜리 우동은 오늘날로 치면 2천원쯤 되는 가격이었다.
이순금을 만나던 때는 국제 정세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중일전쟁이 이제 막 개막하던 시기였다. 언론은 ‘북지사변’이라는 이름으로 긴박한 군사적 충돌 양상을 대서특필했다. ‘(중국) 중앙군이 북상하면 일본군도 필요 조치’ ‘중국 측 사태를 중시, 즉시 긴급회의 개최’ ‘낙양에 비행대 집결’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국가총동원 계획수립, 내무성에서 구체안 작성’ 등이 <매일신보> 1937년 7월19일치 제1면 기사 제목이었다.
여의도파출소 순사들은 이관술 남매를 중국 스파이로 의심했다. 이관술 남매는 파출소 안에서 하룻밤을 자게 됐는데, 순사들의 대화를 들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저것들이 일본말도 모르는 게 필시 중국 스파이 같으니 날이 밝거든 영등포서 고등계로 넘기자’는 내용이었다.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행세한 덕분이었다. 이관술은 가슴이 서늘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영등포경찰서 고등계에는 자기 얼굴을 잘 아는 일본인 형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날이 밝으면 틀림없이 붙잡히는 판이었다. 이관술이 탈출을 결심한 이유였다.
둘이서 함께 거친 탁류를 헤치고 강을 헤엄쳐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 수 없었다. 여동생을 남겨두고 이관술 혼자서라도 도망가기로 작정했다. 요행히 틈타서 파출소에서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한강 물 건너는 것이 큰일이었다. 다행히 소년 시절 고향에서 수영을 배워두었던 터다. 그는 위아래 옷을 벗어서 똘똘 묶어 머리에 이었다. 강을 건넌 뒤를 고려한 조치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굉음을 내면서 거칠게 흘러가는 강물 속에 몸을 담갔다. 천신만고 끝에 영등포 방면으로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아뿔싸. 간신히 건너와서 보니 머리에 이었던 옷이 몽땅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음을 알았다. 이관술은 순 나체가 된 상태로 영등포 둑에 올라섰다.
다행히 어두운 밤중이었고 세찬 비가 오고 있었다. 벌거숭이였지만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채 셋방을 얻은 주인집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때 주인집은 영등포나 노량진 근처에 있었던 것 같다. 주인집에 도착해 대문간에서 가만히 살펴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이관술은 얼른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날이 밝자마자 경찰의 추적이 닥쳐올 터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찰의 압박이 심해질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경성을 벗어나야만 했다. 이관술은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챙겼다. 그는 날 밝기를 기다려 경성을 떠나 남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철통같은 경계망이 짜일 터이니 열차나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피해야 했다. 오직 걸어서 이동했고 야간에는 다리 밑 걸인들 틈에 끼어서 잠잤다. 그렇게 대전까지 갔다.
일본 경찰은 혈안이 됐다.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시외에까지 수사망을 펼쳤다. 시내에 잠복해 있을 가능성과 경성을 벗어나 지방으로 도주할 가능성을 다 같이 고려했다. 강도 높은 수색 작전이 전개됐다. 그러나 진척이 없었다. 여의도 사건이 벌어진 지 사흘째 되던 7월22일, 일본 경찰들 속에서는 동요가 일었다. 이번 단서로는 체포하기 어렵고 뭔가 새로운 단서를 얻을 때까지 날카롭게 주시하자는 비관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관술은 지하운동의 천재였다. 1931년부터 해방 때까지 15년간 일본 경찰의 수배망을 뚫고 쉼 없이 비합법 조직활동을 계속했다. 놀라운 기록이었다. 물론 실패도 있었다. 1933년 1월 반제동맹 사건, 1939년 12월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3~4년간 투옥됐다. 그 기간을 예외로 한다면 이관술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장기간 비합법 지하운동에 종사한 혁명가로 손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문헌
‘이재유 일당 이관술, 돌연 경성에 출현’, <조선일보> 1937년 7월23일
京畿道警察部長, ‘京高特秘제1865호의1, 時局柄注意를 要하는 治安維持法違反 容疑者의 行動에 관한 件’, 1937년 7월21일 2~3쪽, ‘思想에 關한 情報(副本)’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https://db.history.go.kr
이순금, ‘오빠 이관술 동지 검거의 소식을 듣고서’, <현대일보> 1946년 7월15일
‘천기예보’, <동아일보> 1937년 7월19일. ‘전선 천기예보’ <매일신보> 1937년 7월19일
이관술, ‘祖國엔 언제나 監獄이 있었다’, <현대일보> 1946년 4월19일
‘共黨 간부 이관술씨 피체’, <현대일보> 1946년 7월10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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