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람 ‘김응빈’은 둘이다. 한 사람은 한자로 ‘가슴 응, 빛날 빈’ 쓰는 김응빈(金膺斌, 1846~1928)이다. 조천리 출신의 원격지 해산물 판매상인 집안이었는데, 45살 되던 해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 이다. 제주도 명월만호, 제주판관 벼슬을 지냈다. 제주판관이란 자리는 행정과 군사 방면을 지휘하는 제주도의 제2인자에 해당하는 고위 관직인데, 1891년 8월부터 12월까지 고작 4개월 근무했을 뿐인데도 조천리 비석거리에 그의 이름을 새겨넣은 ‘선정비’가 서 있다. 한시 짓기를 잘해서 ‘영주음사’ 같은 시회 모임을 즐겼다고 한다. 1898년 가혹한 세금 징수에 반발한 방성칠의 민란이 일어났을 때는 진압군을 이끌고 토벌에 앞장섰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한 사람 김응빈(金應彬, 1914년생)은 ‘응할 응, 빛날 빈’을 쓴다. 두 사람의 출생연도에는 약 70년의 차이가 있으므로, 행적이 겹칠 이유는 없었다. 이 사람은 구좌면 월정리 출신인데, 제주 판관 김응빈이 관청 주변에서 시종한 것과 달리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행동하는 특성을 보인다.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부모가 자기 땅에서 직접 농사짓는 한편으로 “해산물 생산품을 육지로 무역”하는 일을 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닷길을 이용해서 해산물 원거리 판매업에 나선 제주 사람들은 그러지 못한 사람들보다 유족하게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시골 부잣집 둘째 아들이라서 그런지 김응빈은 허약하게 자랐다. 편식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각기병에 걸려서 다니던 보통학교를 1년간 쉬어야 했다. 각기병이란 비타민 B₁이 부족해 생기는 질환이다. 다리 힘이 약해지고 근육통과 식욕부진 등이 나타나 제대로 걷지 못하는 병이다. 잡곡밥, 돼지고기, 감자, 콩, 삼치 등 비타민 B₁이 든 식품을 매일 섭취해야 하는, 한마디로 골고루 잘 먹어야 낫는 병이다.
김응빈의 초등교육은 늦은 편이었다. 학업을 도중에 중단한 때문이기도 했고, 입학연도가 늦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다. 그는 17살에야 비로소 초등교육기관을 졸업했다. 1930년 3월 제주읍에 있는 북제주보통학교의 졸업장을 쥐었다. 월정리에서 제주읍까지의 거리는 27㎞였다. 걸어서 통학할 거리가 아니었다. 보통학교를 마치기 위해 그는 아마 고향 마을을 떠나 제주읍 지인 집에서 기식하거나 자취해야 했을 것이다.
“1930년 4월 그 지방 중등교인 농업학교 1년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에서 돌아온 지방 청년들과 지방 선배들에게 현 사회제도에 대한 모순된 이야기와 반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으며, 책으로는 <자본주의 기구> <지금의 세상> <공산당 선언>을 처음으로 얻어보면서 자기의 사상적 감화를 받기 시작하였다.”1
김응빈은 사회주의사상의 감화를 처음 받은 때를 17살 되던 해라고 기억했다. 1930년 제주농업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한 해였다. 그 학교는 제주도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보통학교 6년 졸업자만이 입학 자격을 얻는 3년제 실업학교였다. 당시 제주도 전역에는 16개 보통학교가 설립돼 1개 면에 하나씩 초등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중등교육기관은 오직 제주농업학교뿐이었다. 한 학년 정원은 50명이었다. 입학하기 쉽지 않았다.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하려면 해마다 3월에 나흘간 매일 오전 9시부터 한 과목씩 시험을 치러야 했다. 1926년에는 일본어, 산수, 이과, 일본지리·역사 과목을 통과해야 했다. 입학 경쟁률이 높았다. 약 5 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이처럼 중등교육기관이 희소했기에 제주읍에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무직 상태로 세월을 보내는 청년이 해가 갈수록 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방 청년들과 지방 선배들’이 있었다는 문장에 눈길이 간다. 일본에 유학 중인 제주 청년들이 방학을 맞이해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는 말이다. 김응빈이 사회주의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바로 이들을 통해서였다. <자본주의 기구> <지금의 세상> <공산당 선언> 등의 책을 접했다고 한다. 유명한 사회주의 이론가 야마카와 히토시가 지은 <자본주의 기구>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기본 개념을 요령 있게 설명한 80쪽짜리 소책자였고, <지금의 세상>은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한 실상을 폭로하는 50쪽 분량의 베스트셀러였다. <공산당 선언>도 당시 일본에선 합법적으로 출판됐기에 쉽사리 구할 수 있는 책이었다. 십 대 후반의 중등학교 재학생이 처음 접한 사회주의 서적이었다.
그 시절 제주 사람들은 배편으로 목포나 부산 가는 것과 비슷하게 일본 오사카를 오갈 수 있었다. 제주~목포, 제주~부산, 제주~오사카를 왕복하는 기선이 취항했다.2
제주 사람 속에 일본 유학생이 많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방학이 되면 제주도 곳곳에서 유학생 초청 모임이 열렸다. 보기를 들어보자. 1928년 7월29일, 제주읍내 갑자의숙 강당에서 외지에 유학하는 중등학교 학생과 제주농업학교 학생들이 간친회를 열었다. 그 전날인 7월28일에는 조천리 보통학교 강당에서 유학생 환영회를 열었는데 80여 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3 바로 이런 자리가 제주 소년들이 신문물을 접하고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통로가 됐다.
“그러다가 1931년 3월에 재학 중인 농교에 교장 배척 운동에 참가하여 교장 집 습격하였다는 이유로 출교를 당하였다.”4
김응빈은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3개년 수학 기간 중 고작 1년을 마쳤을 뿐이다. 1931년 3월 제주농업학교 폭동사건에 연루된 탓이었다. 발단은 3월7일 거행된 졸업식이었다. 졸업생 36명 가운데 3명에게 졸업증서 수여가 취소됐음이 통보됐다. 당사자들은 승복하지 않았다. 교사들에게 이유를 물으며 거세게 항의했다. 이 항의 대열에 졸업생들도 동조해 나섰다. 3월9일에도 소동은 계속됐다. 급기야 학생들이 학교를 습격했다. 교무실에 난입해 실내 집기를 부수고 일본인 교사들을 구타했다. 교사들은 담장을 넘어 학교를 탈출하고 경찰이 출동했다. 교장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리창이 깨지고 교장도 폭행당했다.
사건은 계속됐다. 제주도 곳곳에 불온 격문이 살포됐다. 제주읍내는 물론이고 화북리, 삼양리 장터 거리에 격문이 나붙었다. 3월15일 밤에는 조천리에도 격문이 출현했다. 각지에서 연이어 격문이 나붙자 경찰은 긴장했다. 잘 조직된 세력이 잠복했다가 고개를 들고 나서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육지에서 전남도경 형사대가 제주도로 증파됐다. 목포 검사국에서도 검사가 현장에 출장을 나섰다. 사방에서 가택수색을 하고, 학생들이 속속 체포됐다. 피검된 수는 20명이 넘었다. 그 속에 김응빈도 있었다. 문제의 원인은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견지하는 터무니없는 인격모독과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선인을 야만시해 민족적 차별 언어를 서슴없이 입 밖에 냈다. 심지어 영어·수학·물리·화학 등 중요 교과목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자질 부족의 교사들이었다.
3월25일, 피체된 학생들이 제주항을 통해 목포로 호송되던 날이었다. 부두에는 가족과 친지, 동료 학생들이 무리 지어 나왔다. 넓은 축항 광장에 수천 명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는데 경관이 총출동해 철통같이 경비를 섰다고 한다.
김응빈은 마지막 단계에서 다른 두 학생과 함께 석방 대상자로 분류됐다.5 그는 13일간의 구류 끝에 풀려났다. 하지만 학교를 계속 다닐 수는 없었다. 그는 교장 사택을 습격한 혐의로 출교 처분을 당했다.
“1933년 초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가지고 그해 4월에 대판시 상업학교 3학년에 편입하고, 1936년 3월에 졸업하였다. (…) 그 후 동경으로 건너가 그해 4월 동경 와세다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고, 1939년 3월 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6
김응빈의 학업은 18살에 중단될 뻔했다. 그러나 수산물 육지 거래로 넉넉한 가산을 이룬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방치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유학 보내기로 결정했다. 유학지는 제주 사람이 밀집해서 거주하는 오사카였다. 20살 되던 1933년에 김응빈은 오사카시 히가시요도가와구에 있는 나니와상업학교 3학년 편입시험에 응시했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나니와’(難波, 浪華)는 오사카의 옛 지명이다. 이 학교는 1921년 설립된 주간 5년제 실업학교였다. 그곳에서 중단될 뻔한 중등교육을 이어서 이수했다.
오사카 생활에서도 김응빈의 사회주의 수용은 계속됐다. 그는 상업학교 재학 중에 <맑스주의 경제학>과 레닌의 저술 <국가와 혁명> 등을 비롯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하여 “이 사회제도의 모순의 해결은 혁명적 수단에 의해서만이라는 자체의 인식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또 자기 눈으로 직접 오사카 내 공장노동자 생활과 조선인 노동자 생활을 목도함으로써 현 사회제도의 견해를 더욱 명확히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김응빈의 유학 생활은 중등교육에 머물지 않고 고등교육까지 이어졌다. 나니와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거처를 도쿄로 옮겼다. 일본 수도로 진출한 것이다. 그는 와세다대학 법과 전문부에 입학하는 데 성공했고, 3년 뒤 전문부 과정을 무사히 졸업했다.
대학에서도 그의 사회주의 탐구는 계속됐다. 재학 중에 ‘맑스주의와 민족문제’ ‘일보전진 이보퇴각’ ‘조직론’ 등을 연구했고 졸업 뒤 나아갈 길을 명백히 했다. 대학 1학년 때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제주·목포 출신자들의 동경유학생친목회 송년회 석상에서 감상담을 말하던 중에 불온한 언동이 섞였다는 이유로, 도쿄 오쓰카경찰서에 구인돼 40일간이나 취조받았다. 대학 3학년 때는 여름방학을 맞이해 제주도에 돌아갔는데, 귀향 당시의 언행을 문제 삼아 제주경찰서에 나흘간 갇히기도 했다.7
김응빈의 사회주의 탐구는 진정성 있는 것이었다. 그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1939년 4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울로 향했다. 노동조합운동에 헌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서울 일원의 섬유공장 노동자 조직화와 교양 사업에 발을 내디뎠다. 비밀결사 경성콤그룹에 가입했고, 김삼룡과 손잡고 적색노동조합운동에 뛰어들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 문헌
1. 김응빈 <자서전>, 1쪽, 1948년 8월.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798 л.14-15об
2. ‘주요도시순회좌담, 제23 제주편(2)’, <동아일보> 1931년 1월27일
3. ‘유학생의 회합’, <동아일보> 1928년 8월3일
4. 김응빈 <자서전>, 1쪽, 1948년 8월
5. ‘제주농교사건, 목포 검사국으로 이송’, <조선일보> 1931년 3월31일
6. 김응빈 <자서전>, 1~2쪽, 1948년 8월
7. 경성서대문경찰서 ‘피의자 金澤應彬 신문조서’, 1941년 4월3일. <이관술 외 15명 신문조서> 5책, 650~652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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