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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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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내 독립운동 힘빼기, 성균관 습격 사건

이승만 독재정권, ‘독립운동가’ 김창숙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탄압해믿었던 젊은이들에게 끌려나오는 등 가슴 아픈 고초 겪어
등록 2022-11-16 17:11 수정 2022-12-09 08:02
4·19혁명 이후 성균관을 되찾은 기념으로 유학자 전통 의관을 갖춰입고서 대성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유도회 정통파. 한가운데 앉은 이가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김창숙이다. 임경석 제공

4·19혁명 이후 성균관을 되찾은 기념으로 유학자 전통 의관을 갖춰입고서 대성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유도회 정통파. 한가운데 앉은 이가 유도회총본부 위원장 김창숙이다. 임경석 제공

“아! 참 비통합니다. (…) 오늘날 유림계의 현실은 공자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요? (…) 전국 유림 여러분 앞에 읍소하오니,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간절한 의분으로써 일치단결하여 전에 없던 이 괴변을 기어코 숙정할 대계획을 수립하여 용감히 매진하신다면, 자유당의 강권도, 경찰의 압력도, 이명세(李明世), 이성주(李性柱)의 흉악한 음모도 아무런 걱정할 바 없으며, 최후의 정의적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음을 확신합니다.” 1

노년의 김창숙(78)은 침통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성균관의 유서 깊은 건물 명륜당에서였다. 안에는 133명이 들어차 있었다. 전국유림대회에 출석한 대의원들이었다. 1956년 12월15일에 열린 ‘전국유도회대표자 및 향교대표자대회’ 석상이었다.

원래 오전 10시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개회가 지체됐다. 하마터면 대회가 열리지 못할 뻔했다. 날씨나 교통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그날 서울의 최저 기온은 영하 13.5도라서 매우 추웠지만, 맑은 날씨였고 때때로 흐릴 뿐이었다.2 모임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한파라 보기는 어려웠다. 대회가 제때 열리지 못한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경찰의 압력’ 탓이다. 관할 관서인 동대문경찰서는 정사복 경찰대를 파견해 대회장을 봉쇄했다. 경찰은 이 대회를 허가받지 않은 집회로 간주했다. 모여드는 대의원들의 해산을 종용했다. 평화로운 종교단체의 집회를 불허하다니? 상식 밖의 일이었다. 현장에서는 소란이 일었다. 말싸움, 실랑이, 고함이 오갔다. 경찰의 방해에도 대의원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어슬렁거리면서 대회장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의 경계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오후 1시30분에야 가까스로 회의를 열 수 있었다.

폭행,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선 유도회 비정통파 지도자 이성주. 1957년 6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찍힌 사진이다. 임경석 제공

폭행, 재물손괴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선 유도회 비정통파 지도자 이성주. 1957년 6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찍힌 사진이다. 임경석 제공

자유당·경찰과 유착한 ‘농은파’의 쿠데타

김창숙이 말하는 ‘전에 없던 괴변’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두 개의 유림대회가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열린 상황을 가리켰다. 하루 전인 12월14일에 유림대회를 자임하는 또 하나의 집회가 열렸다. 서대문에 있는 농업은행 본점 회의실에서 열린 이 대회의 명칭도 같았다. ‘전국유도회대표자 및 향교대표자대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칭으로 불렀다. 농업은행 건물에서 형성됐다는 뜻으로 ‘농은파’라고 했다. 또 김창숙이 이끈 유림대회를 정통파라고 부르는 한편, 이 대회를 가리켜 비정통파라고도 했다. 이 집회에서는 독자의 집행부를 선출했다. 이기원(유도회 위원장), 송경섭(부위원장), 김상도(중앙위원회 의장), 이성주(중앙위원회 부의장)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 중 두 사람은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다. 김상도는 경북 영천을 지역구로 하는 재선 의원이었고, 송경섭은 전남 고흥 기반의 초선 의원이었다. 이 집단 속에서 가장 활동력이 활발한 이는 이성주였다. 그래서 이 그룹을 가리켜 이성주 그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유림이 둘로 분열된 사실만으로는 ‘괴변’이라 하기 어렵다. 그것이 괴변인 까닭은 이성주 그룹이 집권여당인 자유당과 경찰에 깊이 유착됐기 때문이다. 1956년은 제3대 정부통령선거가 있는 해인데, 이성주는 선거 석 달 전 ‘유도회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는 데 앞장섰다. 그해 5월15일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된 뒤로도 자유당과 이성주 그룹의 유착은 계속됐다. 아니, 더욱 강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신문 보도의 폭로에 따르면, 그해 11월8일 자유당 요인들과 내무부 고위층 그리고 유도회 몇몇 간부의 연석회의가 있었다.3 농은파 유림대회가 있기 약 한 달 전이었다. 그들은 유도회 내에서 현 위원장 김창숙을 비롯한 주요 인물 30명가량을 제거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김창숙이 말한 ‘이성주의 흉악한 음모’란 바로 이것을 가리켰다. 음모의 골자는 둘이었다. 먼저 유도회 지방 기구인 전국 각지 229곳의 향교 조직을 장악하고, 이어서 전국유림대회를 통해 유도회와 성균관의 집행부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김창숙 옹을 중심으로 한 정통파와 김상도 군을 주동 인물로 한 비정통 농은파 간에 주도권 쟁탈을 계속해오던 유도회는 급기야 양파 간에 정면충돌을 일으켰는데, (…) 일요일인 13일 상오 10시경 소위 농은파 20여 명은 정통파 직원 10여 명이 경찰에 소환을 당하고 빈틈을 타서 성균관에 난입하여, 김창숙 옹을 강제로 끌어내어 자택으로 축출시키고 성균관을 점령하는가 하면…” 4

1957년 1월15일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다. 둘로 나뉜 유림 집단이 근 600년간 존재해온 문화재 성균관 관리권을 장악하기 위해 충돌했다는 내용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정통파 이성주 그룹 20여 명이 성균관을 습격했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성균관을 관리하던 정통파 김창숙 그룹의 임직원들이 동대문경찰서의 소환을 받아 부재한 틈을 타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경찰의 편파성이 감지된다. 이때도 경찰이 이성주 그룹의 성균관 장악을 돕고 있음을 본다. 경찰은 유도회 분규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그런 태도를 취했다.

한 달 전부터 ‘흉악한 음모’

이성주 그룹의 도발 목적은 성균관 건물을 자신들이 관리하는 데 있었다. 건물의 재산 가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균관 관리권은 곧 유도회와 성균관, 성균관대학교, 성균관재단을 모두 장악하는 열쇠 같은 것이었다. 그뿐인가. 해마다 거행하는 최정점의 권위 있는 의례인 ‘석전’을 주재하는 권한도 달려 있었다. 공자의 탄생일을 기념하여 올리는 장엄하고 우아한 의례였다. 상징과 같았다. 석전을 주재하지 않고서는 유도회의 주권을 쥐었다고 할 수 없었다.

사건은 1957년 1월13일부터 22일까지 열흘간 계속됐다. 첫 국면은 비정통파가 완력을 행사해 성균관 사무실을 접수한 13일 오후 2시부터 14일 새벽에 이르는 시간이다. 둘째 국면은 정통파 청년들이 사무실 탈환에 나선 15일 새벽 시간이다. 정통파는 목적을 달성했으나, 머지않아 출동한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그중 7명의 청년이 폭행과 건조물 파손 등의 혐의로 연행되고 말았다. 사무실은 다시 비정통파 손으로 넘어갔다. 셋째 국면은 16일 이후부터다. 정통파 인사 20여 명이 사무실을 넘겨달라고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갔고, 그에 맞서서 비정통파 인사들도 문을 걸어 잠근 채 사무실 안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앞에서 살펴본 신문 기사 중에 “김창숙 옹을 강제로 끌어내어 자택으로 축출”했다는 구절에 눈길이 간다. 김창숙은 거동이 불편했다. 70대 후반의 노년기인데다, 일제 치하 옥중에서 겪은 참혹한 고문 때문에 자력으로 걷기 힘든 신체장애인이 됐다. 그는 부축하는 사람이 있어야 외출할 수 있었다. 심산(心山)이라는 호 외에 김창숙이 즐겨 쓰는 별호로 ‘벽옹’(躄翁)이 있다. 앉은뱅이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는 73살 되던 해에 탈고한 자서전에 <벽옹 73년 회상기>라고 제목을 달았다. 벽옹이란 독립운동에 헌신한 혁명가의 고초와 내면의 자긍심을 상징하는 메타포였다.

유도회 비정통파를 이끈 자유당 재선 국회의원 김상도. 유도회 비정통파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임경석 제공

유도회 비정통파를 이끈 자유당 재선 국회의원 김상도. 유도회 비정통파 중앙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임경석 제공

‘앉은뱅이 늙은이’를 강제로 끌어내

비정통파가 성균관을 점거하기 위해서 몰려오던 날, 김창숙도 유도회총본부 위원장이자 성균관장 자격으로 사무실을 지켰다. 그는 자기 뜻과 무관하게 자리에서 쫓겨났다. 17살 되던 김창숙의 손녀 김주(金朱)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세 청년이 할아버지를 끌어내렸다. 김익환이 할아버지를 업고, 김상구가 뒤에서 밀고, 누군가 이름을 잊은 또 한 사람이 왼쪽에서 부축한 채였다. 할아버지는 격노했다. “네 이놈” 고함치면서 자신을 업은 김익환의 귀를 힘껏 잡아당겼다. 한쪽 귀가 찢어져서 피가 흐를 정도였다. 이 청년들은 평소에 김창숙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할아버지의 아낌과 귀여움을 받았다. 그래서 손녀도 이름을 알 정도로 친근하게 지내던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믿었던 젊은이들에게 배신당한 것을 못내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5

김창숙은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그만둬야 했다. 1956년 2월에 그랬다. 이승만 정권 문교부 당국의 강요 때문이었다. 문교부는 1955년 내내 여러 차례 김창숙 총장 퇴직을 종용하는 공문 통첩을 발송해왔다. ‘정년’을 초과했다는 이유다. 그러나 정년 제도는 공무원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한정해 적용되고 실정법상 사립대학 총장에게는 적용할 수 없었다. 사립대학 총장이 몇 살까지 재직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해당 사립대학이 결정할 문제였다. 당시 시행되던 교육공무원법에도 교육공무원의 임면에 관한 규정은 사학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었다.

식민통치에 복종하던 이들에게 성균관 넘겨

문교부가 도대체 근거도 없이 퇴직 압박을 가한 이유가 무엇일까? 뻔했다. 김창숙이 견지한,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비타협적인 저항과 투쟁 때문이었다. 김창숙은 이미 1952년에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맞서다가 국제구락부 테러사건을 겪은 바 있었다. 또 이승만 하야를 권고하는 개인 성명을 세 번이나 발표했다. 어떻거나 김창숙은 문교부의 부당한 압박에 1년여 맞섰다. 1956년 1월 문교부는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오는 2월6일까지 퇴직하지 않을 경우 성균관대학교 존립에 관한 엄중한 조치를 가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해가 제3대 정부통령 선거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문교부 장관 이선근은 이승만의 재선을 위태롭게 할지 모르는 위험요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56~1957년 유도회 분쟁은 김창숙이 겪은 고초 제2막이었다. 그가 갖고 있던 유도회총본부 위원장과 성균관장 직을 박탈하려는 시도였다. 김창숙의 사회적 영향력이 이승만 독재 정권의 존립과 영속화에 장벽이 됐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 입장에서는 김창숙이 지닌 사회적 직위를 남김없이 빼앗고 영향력을 무력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뿐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했다. 김창숙이 쥔 힘을 자유당 수중으로 옮겨오려 했다. 유림 속에 내재하는 독립운동 전통을 배제하고 식민통치에 복종하던 경학원 전통 계승자들에게 유도회와 성균관의 주권을 넘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참고 문헌

1. ‘전국유도회대표자 및 향교대표자대회 회의록 발췌’, 단기 4289년 12월15일, 김석원 <유도회 성균관 수난 약사>, 성균관, 101~103쪽, 1962년

2. ‘일기예보’, <조선일보> 1956년 12월16일

3. ‘유도회 개편 기도’, <동아일보> 1956년 12월2일

4. ‘단상단하’, <동아일보> 1957년 1월15일

5. 김주 인터뷰, 2021년 7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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