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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은 ‘평평한 지구’처럼 허황한 믿음

로버트 서스먼의 <인종이라는 신화>
등록 2022-11-05 17:52 수정 2022-11-06 07:41

1950년 7월, 유네스코(UNESCO)는 “인종은 생물학적 실재라기보다 사회적 신화”이며 “생물학은 인류의 보편적 동질성을 증명했다”고 선언했다. 인류학·유전학·생물학·사회학·심리학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방대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발표한 성명이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종(주의)’은 여전히 유사과학의 외피를 두른 채 편견과 혐오, 배제와 차별을 전염시킨다.

인종주의는 인류가 피부색과 혈통, 문화, 종교 등에 따라 차등적 위계로 구별된다는 믿음이다. 비기독교인 박해, 흑인 노예제, 유대인·집시 학살의 ‘과학적’ 근거였다. 인종은 실체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적 태도에 앞서 과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는 아종(하위 종)조차 없는 단일 종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집단 사이보다 집단 내 개인 차이가 더 크다.

미국 인류학자 로버트 월드 서스먼의 <인종이라는 신화>(김승진 옮김, 지와사랑 펴냄)는 15세기부터 현재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발호한 인종주의의 계보를 추적하고, “무지·감정·증오·편견에 기초했던 (…) 불관용이 왜 ‘평평한 지구’만큼이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다양한 사료와 시대별 담론, 과학적 데이터로 보여준다.

15세기 스페인에선 본디 기독교도와 개종 유대인 기독교도를 생물학적으로 구별하려 했다. 종교재판은 ‘순수하지 않은 혈통’을 판별하는 수단이었다. 이후 500년 가까이 유럽에서 ‘타자’를 설명하는 이론은 양대 축으로 지속했다. ‘다원발생설’은 서유럽 기독교도가 아닌 인간은 신이 아담을 빚기 전부터 지구에 있었던 원시인종이라는 것. ‘일원발생설’은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긴 하지만 일부가 덜 이상적인 환경조건 탓에 퇴락했다는 것. 어느 쪽이든 서유럽인이 우월하다는 확신은 같았다.

근대의 문을 연 계몽주의자도 인종주의에 갇혀 있었다. 18세기 철학자 칸트는 인간을 백인종-황인종-흑인종-붉은 인종 순으로 구분하고, 백인종을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봤다.다윈의 <종의 기원>(1859) 발간 뒤에는 적자생존 개념과 멘델의 유전법칙을 버무린 우생학이 20세기 전반까지 맹위를 떨쳤다. 선택적 육종, ‘부적합자’의 강제 단종과 생체실험, 지능검사, 이민 제한, ‘열등종’의 대학살이 고안되고 집행됐다. 나치의 우생학과 미국 기업들이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즈음 체질인류학과 문화인류학도 인종주의에 힘을 실었다.

20세기 이후 미국에선 현대판 ‘과학적 인종주의’가 반이민 단체와 극우 정치세력의 프로파간다와 반이민 정책에 자금과 논리를 지원한다. 인종주의가 생물학적 실재가 아니라 정치·경제·사회적 의도로 고안된 발명품이라는 주장은 미국 건국 초기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사이에서조차 인종 구별이 있었다는 것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19세기 후반까지도 미국에서 이탈리아 등 남유럽계 ‘새 이민자’는 ‘백인’에 끼지 못한 채 ‘하얀 검둥이’(White Nigger)로 불렸다. ‘구이민자’인 독일·아일랜드·북유럽계 정착민이 미국에서 ‘백인성’을 인정받은 것도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이전까지 ‘진정한 백인’은 건국의 주류 집단인 영국계(앵글로색슨) 시민뿐이었다. ‘미국의 인종 감별 잔혹사’는 재미 한인 사회학자 진구섭 맥퍼슨대학 교수가 쓴 <누가 백인인가?>(푸른역사 펴냄, 2020)에 잘 설명돼 있다.

서스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과학적 인종주의도 나치즘의 극단주의와 함께 끝났으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며, “인간의 존엄, 자유, 정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인종적 편견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 기반해 혐오를 퍼뜨리려는 사람들과 맞서 계속 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인간 다양성의 경이로움을 알려주어야 하고, 세계에 존재하는 놀라운 인종적 다양성을 누리도록 가르쳐야 한다. 편견과 혐오가 아니라 관용과 사랑을 가르쳐야 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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