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왕>과 <복학왕>의 작가 기안84가 원래 그리고 싶었던 만화는 “신도시 고등학생”이었다고 한다. 대상과의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 농밀하고 노골적인 묘사로 극찬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그가 ‘음울한 성장물’의 무대로 신도시를 설정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아닌 게 아니라 웹툰 학원물의 배경은 십중팔구 경기도 신도시다. 서울과 아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논밭에 주먹구구식으로 지은 아파트 단지. 방과 후 갈 곳이라곤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노래방, 비릿한 물 냄새가 나는 둑방길뿐인 동네. 꿈 많은 고등학생의 욕구불만을 생생히 그려내기엔 역사나 정취라곤 없는 신도시가 제격이렷다.
<우리 손으로 만든 머내여지도>(한울 펴냄)는 신도시에 대한 이런 편견에 도전한다. “난개발의 대명사인 신도시의 아파트촌에는 정말 역사가 없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책은 ‘머내’라 불리는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과 고기동의 역사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러모은다. 단순히 우리도 이렇게 ‘근본 있는’ 동네라며 과시하려는 게 아니다. 머내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의 흔적, 그 울퉁불퉁하고 복합적인 기억‘들’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마을’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본래 험천(險川)이라 불리던 머내는 이름답게 거친 땅이라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하던 농촌마을이었다. 변화의 바람이 분 건 1968년, 서울과 수원을 잇는 경수고속도로가 뚫리면서다. 경부고속도로의 첫 구간이 이곳을 지나며 머내는 1905년 경부철도 개통 이후 오랫동안 상실했던,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위상을 회복했다.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해외 섬유를 시작으로 제사공장과 염색공장, 피혁공장이 들어섰다.
용인군 내 다른 지역보다 빠른 1972년에 전기가 들어오는 등 산업화에 앞서가던 머내는 1980년대에 이르러 다시 한번 탈바꿈한다. 공장들이 하나둘 떠나갔고, 빈자리에 가구 대리점이 들어섰다. 한때 ‘수지가구단지’라 불리며 명성을 떨쳤으나, 1990년대 이후 분당신도시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에 더해 지방자치제 실시와 그린벨트 해제가 맞물리며 아파트 건설 붐이 일었다. 머내를 상징하던 깻잎 냄새는 염색공장의 화학약품 냄새에, 화학약품 냄새는 아파트 공사현장의 먼지 냄새에 묻혀 사라졌다.
그렇게 아파트의 숲이 된 머내지만, ‘신도시’와 ‘난개발’만으론 이곳을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 비밀리에 조선을 찾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적응 훈련지’ 구실을 했던 손골 교우촌, 오로지 마을 주민들의 자체적인 기획만으로 이뤄진 3·1 ‘머내만세운동’의 기억 등 개발 광풍으로도 지울 수 없는 역사가 머내에 있다. 지금은 염광피부과란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은, 한센인 정착촌이던 ‘머내의 섬’ 염광농원 역시 역사의 일부다. 가까운 버스정류장을 두고도 주민들의 위협이 두려워 30㎞에 이르는 산길을 넘어다니고, 자녀가 ‘미감아’(未感兒)란 낙인이 찍혀 학교에 갈 수 없었던 한센인의 삶을 머내여지도팀은 묵묵히 담아냈다.
단순히 ‘빛과 어둠’이란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작은 동네가 품은 복잡다단한 역사 앞에서 머내여지도팀은 종종 멈춰 선다. 아파트 불빛이 꽃 같았다는, 그제야 우리 동네도 도시가 된 것 같았다는 토박이에게 도시생활의 삭막함을 ‘설교할’ 수 있을까? 옛 기억을 ‘마을 만들기’의 토대로 삼으려는 이주민 앞에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반문하는 원주민의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마을을 둘러싼 그런 다양한 생각을 한 갈래로 정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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