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밭 울타리 옆에서 살아남은 도라지꽃.
“그거 물릴게요. 계산에서 빼주세요.”
쉰 살이 되도록 오로지 자존심 하나로 버틴 내가 동네마트 계산대에서 사려던 물건의 가격표를 보고 모양새 빠지는 짓을 한 건 2주 전이다. 평소 참나물이나 콩나물 등 나물 반찬이 먹고 싶을 때 내가 사다 해먹는다. 이날따라 채소 매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건 푸릇푸릇한 시금치였다.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다진 마늘과 깨소금, 조선간장을 조금 넣어 무치면 비타민 가득한 시금치나물을 먹을 수 있겠다 싶어 선뜻 집어들었다. 근대나 얼갈이배추처럼 한 단에 2980원쯤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바코드에 찍힌 금액은 무려 7980원. 순간 허리춤까지 떨어진 아래턱을 간신히 추어올리며 “너무 비싸네”를 뇌까렸다.
올해 유독 짧은 비와 폭염을 오간 날씨 탓에 채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이런 심술궂은 날씨의 배후로 학자들은 기후변화를 지목한다. 작물 재배 북방한계선은 북상을 거듭한다. 경북 지역이 주산지이던 사과는 강원도 정선·영월·양구로 산지를 옮겼다. 제주에서만 나던 감귤이 전남과 경남에 뿌리내린 지도 오래다. 제주도 농업기술원은 얼마 전 마늘 농가에 올해 파종 시기를 평년보다 열흘가량 늦추라고 권했다. 너무 일찍 심으면 기후변화에 따른 고온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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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은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다. 경북 영천에서 사과농사를 짓던 농부는 강원도 양구로 이사해 사과를 계속 키워야 할까? 아니면 영천에서도 언젠가 재배가 가능할지 모르는 감귤이나 바나나 농사를 준비해야 할까? ‘기후변화는 농업의 위기이자 기회’라고 말하는 이들은 남 얘기니까 쉽게 할 뿐이란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개인 농사는 조금 다르다. 나는 농사를 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내가 키운 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벌 일은 없을 테다. 따라서 내가 먹을 작물만 잘 재배해 맛있게 먹으면 된다. 파종 시기를 놓치거나 거름을 제대로 주지 못하거나 해충 관리를 잘 못해 생긴 피해는 고스란히 나 혼자 감내하면 된다. 그리고 부지런히 더 배워 이듬해에 잘하면 된다. 혹시 아는가. 내년에 또 시금치 한 단 가격이 1만원까지 치솟을 때 내 밭엔 다행히 시금치가 풍년이라 나 혼자 끼니마다 시금치로 된장국 끓이고 나물 무치고, 잡채와 김밥에도 듬뿍 넣어 배 떵떵거리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지….
밭에 풀만 가득하니 한 해 농사 망친 얼치기 농군이 혼자 평상에 앉아 한숨 쉬며 행복한 상상을 하는데, 울타리 옆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도라지꽃이 고개를 까닥거린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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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들: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분해정원 농부, 전종휘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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