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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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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잔병의 전리품 ‘개복숭아술’

옥수수, 고추, 오이, 호박, 가지가 초토화된 밭에 주렁주렁 열린 복덩이 개복숭아
등록 2022-08-29 13:15 수정 2022-08-30 08:49
밭 한쪽에 옮겨 심은 개복숭아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밭 한쪽에 옮겨 심은 개복숭아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올해 농사는 망했다. 옥수수, 고추, 오이, 호박, 가지도. 숨넘어갈 듯한 가뭄에 이어 한 치 오차도 없이 들이닥친 장마를 이기지 못했다. 얼치기 농군이 부지런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주말마다 덥다고 안 가고 비 온다고 안 가고 피곤하다고 안 갔더니 밭이 작살났다. 지금 밭을 지배하는 건 내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그놈의 풀이다. 이미 이 시대에 한 획을 그은 가수 정태춘은 세상을 바꾸려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자신을 ‘패잔병’이라 불렀다는데, 나는 그깟 잡풀 따위에 무릎 꿇은 패잔병이 됐다.

자책과 원망에 사로잡혀 눈물이 그렁그렁하려는 찰나, 밭 한쪽에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개복숭아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태 전 밭 옆 야산에 자생하는 큰 개복숭아나무 아래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어금버금하던 어린 개복숭아 세 그루를 밭에 옮겨 심었더니 쑥쑥 크던 한 녀석이 올해 열매를 풍성하게 맺었다. 구슬땀을 훔쳐가며 수확에 나섰다. 양동이 두 개를 꽉 채울 정도로 많다. 씨알이 나름 괜찮다.

초봄에 너무 많은 열매가 맺혔기에 하나 건너 하나꼴로 솎아내기를 해준 덕이리라. 역시 무슨 작물이든 솎아내기 할 땐 과감해야 한다. 무, 양파, 상추도 씨앗을 뿌린 뒤 순이 촘촘하게 고개를 내밀면 두 눈 질끈 감고 솎아주는 게 좋다. 조금이라도 아깝다고 주저하다간 얼마 못 가 골고루 안 자란 녀석들과 대면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개복숭아술을 담가 거실 한쪽에 잘 놓았다.

개복숭아술을 담가 거실 한쪽에 잘 놓았다.

복숭아는 털 관리를 잘해야 한다. 촉감이 까끌까끌할뿐더러 잘 닦아내지 않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집에 와서 부엌 개수대에 부으니 꽉 찬다. 주방세제를 뿌린 뒤 계속 뒤집어가며 굴려준다. 깨끗한 물로 서너 번 헹구고 물이 빠지도록 둔다.

동네 마트에서 사온 담금주는 이미 개복숭아를 영접할 채비를 끝냈다. 지지난해까진 흑설탕 혼자 개복숭아를 맞아 효소가 됐고, 지난해엔 절반을 담금주에 내줬다. 그리고 넉 달 뒤 나는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세상에 이토록 그윽한 향을 품은 술이 있단 말인가. 코끝을 쓱 훑고 지나가는 이 깊은 내음을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단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금방 질리는 탓이다. 그런데 설탕 한 꼬집도 넣지 않은 개복숭아술에선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한 단맛과 향이 난다. 연한 붉은색의 자태는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올해 흑설탕 대신 25도짜리 담금주만 10만여원어치 산 까닭이다. 개복숭아나 매실처럼 수분 함량이 적고 단단한 과일은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에, 복분자나 딸기처럼 말랑말랑하고 수분이 많은 과일은 높은 도수 술에 담그는 게 좋다.

거실 한쪽에 자리잡은 개복숭아술 담금통을 볼 때마다 올해 가을과 겨울 저녁이 전례 없이 풍족하리라는 기대가 샘솟는다.

글·사진 전종휘 <한겨레> 기자 symbio@hani.co.kr

*주말농장을 크게 작게 하면서 생기는 일을 들려주는 칼럼입니다.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이아롬 프리랜서 기자, 전종휘 기자가 돌아가며 매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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