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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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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져도 괜찮아 함께 달리자... 가이드러너 세계

시각장애인 곁에서 ‘믿음의 끈’을 손에 쥐고 가이드러너로 뛰어보다
등록 2022-08-27 06:20 수정 2022-08-29 00:15
김승현 가이드러너(오른쪽)가 시각장애러너 김민범과 서울 서초구 반포종합운동장을 달리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김승현 가이드러너(오른쪽)가 시각장애러너 김민범과 서울 서초구 반포종합운동장을 달리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붉은 우레탄이 깔린 육상 트랙을 두 사람이 나란히 몸을 붙인 채 달렸다. 어느덧 트랙 저편까지 뛰어간 둘은 한 사람이 된 듯 포개져 보였다. 각자의 손과 팔목에 걸린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은 동시에 한쪽 다리로 땅을 밀고 다른 쪽 다리로는 무릎을 들어올려 몸을 띄웠다. 지면을 딛고 차고, 빠르게 달리는 두 사람. “어이 좋다! 시너지가 난다!” 시각장애러너 김민범(60)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곁에서 가이드러너 김승현(27)이 함께 달리며 합을 맞췄다.

2022년 8월23일 저녁 7시 서울 서초구 반포종합운동장. 저물어가는 해가 운동장 너머 건물을 불그스름하게 비췄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1천m를 질주하고 2분 쉬고, 다시 또 1천m를 달렸다.

김민범과 김승현은 속력을 즐기는 러너다. 둘이 짝을 이뤄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 나가 은메달과 동메달을 딸 만큼 달리기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날 훈련 도중 달리기 전용 시계로 재봤더니, 이들이 달리는 속력은 최대 시속 20㎞. 1㎞를 달리는 데 3분밖에 걸리지 않는 속력이었다.

“하나, 두이, 서이, 너이!” 김민범이 내는 구령 소리가 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김민범의 보폭은 1m 안팎. 하나 구령에 1m, 둘 구령에 2m 앞으로 나가는 셈이다. 열까지 세면 손가락을 하나씩 차례로 접었다. 눈이 안 보이는 그가 자신이 뛰는 거리를 가늠하는 방법이다.

트랙을 뛰던 두 러너의 앞에 축구공이 굴러왔다. 가이드러너 김승현이 손에 쥔 끈을 살며시 당기며 앞이 보이지 않는 김민범에게 신호를 줬다. 양쪽 끝에 동그란 고리가 달린 끈이 김민범의 팔목에 걸려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속력을 늦췄다. “앞에 축구공이 왔었어요.” 김승현이 말했다. 트랙 안쪽 운동장 인조잔디에서 왁자지껄 떠들며 공을 차는 어린이가 많았다.

55살에 달리기 시작한 시각장애인

김민범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잘 달릴 수 있다. 가이드러너가 시각장애인 곁에서 함께 뛰면 가능한 일이다. 가이드러너는 시각장애러너와 ‘트러스트 스트링’(믿음의 끈)으로 연결된다. 손에 끈을 쥔 가이드러너는 끈을 당기고 풀며 시각장애러너가 안전하게 뛸 수 있게 한다. 가이드러너는 시각장애러너 곁에서 말을 걸며 달리기 상황을 알려준다.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하는지, 달리는 땅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 앞에 사람이나 자전거, 차가 있는지 등을 알게 한다. “저는 앞에 사람이 있다 싶으면 파이팅을 외쳐요. 앞에 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게 되니까요.”(김승현)

김승현은 왜 가이드러너가 됐을까. 김승현은 어릴 때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2008년, 그는 무작정 어른들이 모인 전북 전주 마라톤클럽의 문을 두들겼다. 평균나이로 40대인 마라토너들은 그를 선뜻 반겨줬다. 일요일 새벽 5시마다 그를 데리러 집에 와줬다. 10여 년간 달리기를 즐기던 김승현이 장애인과 함께 달리는 가이드러닝을 알게 된 건 2019년 무렵이었다. 체육교육학과 대학생이던 그는 해외봉사로 떠난 인도에서 태권도 공연 준비를 하다가 다쳤다. 그는 어깨에 철심을 박은 채 1년을 살았다. 평생 하던 달리기도 쉬어야 했다.

“어깨에 근육이 다 빠져서 팔을 잘 못 올렸어요. 그때만큼은 저도 장애를 얻은 듯싶었어요. 시각장애인은 몸이 멀쩡한데도 가이드러너가 없으면 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요. 영국에 가서 가이드러닝 문화를 배우려 한 이유예요.” 2019년 7월 영국에서 가이드러닝 워크숍을 들은 뒤 각종 교육자료를 받았다. 이후 2년 넘게 한 달에 한 번씩 사비를 털어 가이드러닝을 가르쳐주는 교육을 하고 있다. 단 1명의 수강생을 위해 전주에서 서울로 가 수업하기도 했다. 당시 수업을 들은 러너는 2년 동안 가이드러너로 뛰었다.

김민범은 안마사이자 장애인 달리기 선수다. 하얀 치아를 보이며 미소를 잃는 법이 없다. 그는 30대부터 시력이 약해졌다. 망막에 색소가 쌓이면서 기능을 잃어가는 망막색소변성증을 앓아서다. 시력을 잃는 바람에 학창 시절 즐기던 축구, 배구, 권투도 그만뒀다. 2014년 시각장애인 대상으로 열린 국립재활원 스트레칭 프로그램을 듣고 나서야 다시 몸을 움직이게 됐다. 유연성을 되찾고 줄넘기로 체력을 키웠다. 지인이 추천해준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VMK)을 알게 된 뒤 2017년 중순 달리기를 시작했다. 55살에 도전한 첫 달리기였다. “뛰니까 유익한 게 체력이 좋아져요.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요. 풀코스 마라톤을 뛰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풀코스를 뛰었습니다. 5번을 뛰었죠. 제겐 굉장한 자산이에요.”

김승현 가이드러너가 시각장애러너 김민범과 함께 달리기 위해 끈으로 서로의 손과 팔목을 묶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김승현 가이드러너가 시각장애러너 김민범과 함께 달리기 위해 끈으로 서로의 손과 팔목을 묶었다. 김진수 선임기자

블루투스처럼 페어링 되는 쾌감

가이드러닝의 매력을 물었다. “사람마다 달리기하는 이유나 철학이 다 다르잖아요. 저는 같이 뛰는 걸 좋아하고, 선생님(김민범)처럼 빨리 뛰는 걸 좋아해요. 또 달리려면 강제성이 필요한 사람이에요. 약속하면 제가 무조건 달리게 돼요. 제가 안 가면 선생님이 못 뛰니까요.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매주 토요일 아침, 퇴근하고 나서도 이렇게 열심히 뛰지 못했을 거예요.”(김승현)

2020년 2월 미국에서 텍사스 오스틴 마라톤대회를 준비하려 현지 저녁훈련을 하던 때였다. “승현씨, 나 저녁에 뛰는 게 정말 오랜만이야.” 김민범이 건넨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찡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어요. 달리기의 소중함이랄까요. 물론 저도 피곤할 때가 있고 막상 신발끈을 동여매기 싫을 때도 있지만 선생님과 뛰고 나면 언제나 마음이 후련했어요.”

가이드러너와 시각장애러너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제가 키가 더 크다보니 발을 더 빨리 굴러요. 선생님도 보폭을 더 키우겠죠. 서로 항상 100% 맞춰지는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블루투스처럼 페어링이 된다 해야 할까요. 달리기가 딱 들어맞을 때 쾌감이 엄청나요.”(김승현) 김승현은 가이드러너가 되고 나서 더 멀리 더 빨리 뛰게 됐다고도 말했다. “(천천히 달리는) 장거리 훈련은 지루하잖아요. 선생님과 같이 뛰면 지루하지 않아요. 에너지도 있고요. 선생님은 ‘승현씨와 나는 라이벌’이라고 말해요. 우리는 비슷한 실력에 함께 끈으로 연결돼 있으니까요. 먼저 지치면 쉽게 알아채고 장난치며 경쟁하곤 해요. 서로가 페이스메이커가 되는 거죠.”

함께 달리기는 대화이자 치유

트랙에서 빨리 달리는 가이드러닝만 있는 건 아니다. 장지은(33) 가이드러너는 선지원(31) 시각장애러너와 5년째 함께 천천히 뛰고 있다. 이들은 한때 모두 1㎞도 제대로 뛰지 못하던 초보 러너였다. 장지은은 회사생활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금요일에 술을 마시고 주말엔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생활을 반복했다. 2017년 살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북적북적한 분위기가 싫어 러닝크루 대신 선택한 곳이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이었다. 선지원도 사회초년생으로 일하며 몸이 망가졌다. 늦게까지 일하고 라면만 먹다보니 폐결핵에 걸렸다. 당시 천국에 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한번 실컷 달려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그였다. 태어날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아, 뛴다는 건 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둘은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을 알게 됐고 서로 만났다.

두 사람에게 달리기는 대화이고 치유다. 함께 달리며 한 주에 쌓아놨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서로 솔직해져야 마음이 통하고 잘 뛸 수 있으니까요. 처음엔 안 그랬는데 지원이와 저는 점점 솔직하게 말하게 됐어요. 무리한 요구도 거절할 줄 알게 됐고요. 달리며 함께 대화를 나눴고 앓고 있던 우울증도 좋아졌어요.” 장지은이 말했다.

둘은 숨차지 않는 속도로 뛴다. 그래야 말을 나눌 수 있어서다. “언니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제 이야기를 하느라 주변 환경을 느낄 틈이 없긴 해요. 심리상담을 받아본 적 있는데 상담사가 한 시간을 오롯이 저에게 집중해주잖아요. 어떤 이야기든, 어떤 마음이든 간에요. 우리는 서로에게 집중해서 서로의 안전을 책임지기로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요.”(선지원)

장지은은 어느 날 선지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나는 너와 달리며 내 사고가 확장되는 걸 경험해. 함께 달리려고 한 것뿐인데 너와 함께 달리니까 문제를 조금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만약 내가 혼자 달렸다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거야.” 함께 달릴 때마다 둘은 깊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80대 할머니가 돼서도 트러스트 스트링을 쥐고 함께 달리기로 했다. 서울 옥수역에서 동작역까지 12㎞를 왕복으로 천천히 달리며 한 약속이다.

선지원은 자신의 삶에 함께해주는 사람을 모두 ‘가이드러너’라고 말한다. “도우미나 선생님이라는 말도 있지만 저를 수동적으로 만드니까요. 가이드러너에게 단순히 기대어서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간다는 사실이 제게 격려가 돼요. 나도 다른 분들에게 가이드러너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기도 하고요.”

7월24일, 서울 마포구에서 김승현 가이드러너가 연 교육을 들으러 갔다. 그가 개인 돈을 들여 준비한 시각장애인체험용 안경을 하나씩 써봤다. 시각장애인이 겪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뿌옇게 흐려 보이는 백내장, 시야가 터널처럼 좁아지는 녹내장, 뇌가 손상돼 시야가 반으로 줄어드는 반맹증, 얼룩이 생긴 것처럼 시야가 제한되는 당뇨망막병증 등. 이론수업이 끝나고서는 수강생과 번갈아가며 누구는 가이드러너가 돼주고, 누구는 안대를 쓴 채 시각장애인 역할을 했다.

이정규 기자가 7월24일 서울 마포구 뉴발란스 매장 지하 1층에서 장비를 이용해 시각장애를 체험하고 있다. 김승현 제공

이정규 기자가 7월24일 서울 마포구 뉴발란스 매장 지하 1층에서 장비를 이용해 시각장애를 체험하고 있다. 김승현 제공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

수업에서는 시각장애러너과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영국은 정부에서 직접 시각장애러너 명단을 관리한다. 가이드러닝 교육 수업을 듣고 범죄조회를 한 뒤 이상이 없으면 이들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매칭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따로 관리하지 않아, 매주 토요일 아침 8시 남산에서 열리는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 훈련에 참여하면 가이드러너가 될 수 있다. 또는 시각장애인 마라톤클럽이 스포츠 브랜드 ‘룰루레몬’과 진행하는 ‘히어 투 비’(Here to be) 프로젝트에 참여해 시각장애러너를 소개받을 수도 있다. 시각장애러너 한 명에게 여러 명의 가이드러너를 연결해줘 시각장애러너에게 달릴 기회를 늘려주려는 프로젝트다.

“달리기는 두 발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저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내가 내 몸을 앞으로 던질 수 있다는 만족감이 굉장히 컸어요. 시간도 맞추고 장소도 맞춰야 하지만 그 모든 걸 고려해서 뛰기로 작정하고 만났을 때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해요. 달리는 순간이 소중하니까 성적이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에요.”(선지원)

가이드러너가 되려는 이들도 짐짓 겁먹지 않아도 될 듯하다. “달리다 넘어지면 가이드러너가 미안해해요.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길은 내가 이 질주를 끝내지 않고 느려도 계속 가는 것이에요.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천천히 가더라도 끝까지 가요. 가이드러너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누구나 넘어질 수 있다고 꼭 말해요.”(선지원)

나는 가이드러닝 교육을 듣고 한 달이 지나서야 가이드러너로서 첫 경험을 했다. 8월24일 반포종합운동장에서 만난 김민범 시각장애러너가 흔쾌히 함께 뛰자고 말해줬다. 그와 팔을 맞대며 반포종합운동장 트랙 두 바퀴를 뛰어봤다. 오른손으로 끈을 잡고 오른 다리를 내밀었다. 김민범은 왼팔에 끈을 걸고 왼 다리를 뻗었다. 서로 팔을 맞대고 ‘하나, 둘’을 외치며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조금씩 뜀박질은 빨라졌고 둘 사이 리듬도 찾아갔다. “하나, 하나, 하나∼!” 김민범의 구령에 맞춰 발을 디뎠다. “아, 재밌다!” 함께 뛰다가 나도 모르게 나온 탄성이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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