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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중인은 어떻게 엘리트가 됐나

근대 한국 사회 특권층의 뿌리를 찾아간 <출생을 넘어서>
등록 2022-07-16 23:41 수정 2022-07-18 11:09

1789년 프랑스가 격동의 혁명에 휩싸이기 몇 달 전, 가톨릭 성직자이자 법학자, 급진 혁명가 에마뉘엘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치 팸플릿을 출간했다. 명쾌한 논리와 선동적 어투가 혁명가들과 제3신분(평민)의 격정에 기름을 끼얹었다. 전체 인구의 2%도 안 되는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세습신분의 구체제(앙시앵레짐)가 피와 화약 냄새 속에 무너졌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우리는 어땠을까? 황경문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교수(역사학)가 쓴 <출생을 넘어서>(백광열 옮김, 너머북스 펴냄)는 사회적 지위와 상승이 거의 전적으로 출생에 의존했던 조선시대까지의 신분체제가 어떻게 막을 내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을 형성했는지 보여준다. 2004년 같은 제목 의 영문판이 처음 우리말 번역본으로 나왔다. 19세기 조선 말 세습신분 철폐와 근대화 이행은 유혈혁명이 아니라 “내부 체계가 재조정되는 과정”으로 이뤄졌다. 지은이는 기층민중이 아니라 ‘제2신분 집단’이 주도한 그 과정을 세밀하게 탐구했다. 제2신분은 양반·귀족(제1신분)보다 한 단계 낮은 중인·향리·서얼·무반·서북인 등의 총칭이다.

이들은 관직 접근권을 발판 삼아 통치 질서에 진입하고 상층부로 나아갔다. 그 시기는 일제의 조선 침탈과 강점기와 겹친다. 우리의 근대화가 부분적으로 외부에서 이식된 사정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일본과 맺은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 4년 뒤인 1880년, 고종은 새로운 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근대 관료집단의 요람이던 이 기구에 제2신분 집단의 개화파가 대거 진출했다. 영어에 능통한 외교관이자 언론인·사상가였던 윤치호도 외무아문의 주사로 입직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주도자들이 채택한 10개 결의안은 문벌·반상의 벽파, 문무 관료의 존비 구별 폐지, 공사 노비법의 혁파와 인신매매 금지 등 세습신분제 폐지를 못박았다.

관료제의 구조 변경으로 출생신분의 우월성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제2신분 집단은 외국어·법률·의술·회계·신문물 등 여러 근대적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그 지위를 굳혔다. 이들의 명성과 영향력은 후손에 이르러 비관료 부문까지 확장하며 신흥 엘리트 계층을 형성했다. 현진건·최남선·나혜석·주시경·이광수·김소월 등 문예 분야 지식인과 안창호·조만식·이동휘·이승만 등 정치·사회 분야 인물이 그렇게 배출됐다.

근대 이후 한국인을 움직인 강력한 동인은 ‘지위 의식’이었다. 사회적 지위의 결정 요인이 세습신분에서 경제적 부나 학력으로 전환된 것은 새로운 근대성의 징표다. 제2신분 집단이 거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지은이는 “한국사 이해에서 사회 위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보편주의적 역사 모델의 적용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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