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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년

등록 2022-05-07 15:28 수정 2022-05-08 02:1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가끔 이 섬 제주가 갑갑해서 돌아버릴 것 같을 때” 영주(노윤서)는 숨이 차도록 달린다. 영주의 엄마가 도박중독자 남편에게 지쳐 떠나고 나서야 정신 차린 아빠가 혼자 딸 키운 사연을 모르는 사람 하나 없고, 시장에만 가도 온갖 잔소리를 듣는 좁은 세계가 영주는 지긋지긋하다. 서울의 대학에 가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영주의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었다. 고등학교 같은 반의 현(배현성)과 사귀다 임신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임신중지 비용을 마련하고 고민하다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임신 22주차. 수술받으려면 부모동의서를 받아오라는 의사에게 영주는 “낙태죄 폐지돼서 필요 없지 않냐”고 반박할 만큼 야무지지만, “그 애… 내 애기기도 하잖아”라며 울먹이는 현의 말에는 흔들린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이야기다.

태아의 초음파 사진과 심장 소리

영주가 바라던 자연유산은 일어나지 않는다. 임신중지 계획을 다시 세운 영주는 현에게 나만 ‘독한 년’ 만들지 말라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어떤 어려움에도 태아를 선택하는 것은 여성의 ‘인성’을 보증하는 기준이다. 임신중지를 하거나 출산 뒤 아기를 유기하는 것은 ‘악녀’나 하는 짓이고, 아기를 낳은 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떠나보낸 여성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눈물로 속죄한다. 영주 역시 의사가 초음파 영상을 보여준 데 이어 태아 심장 소리를 들려주자 충격받아 오열한다. 괴로워하는 영주에게 현은 아기 심장 소리가 자꾸 들린다며 낳자고 주장한다. 결국 영주는 ‘독한 년’이 되지 않기로 ‘선택’한다. 둘은 사랑으로 이 태풍을 헤쳐나갈 작정이다. 영주가 꿈꿨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지만.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나 심장 소리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서 일종의 ‘출산 플래그’다. 임신을 원하지 않던 여성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려놓는 장치로 흔히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임신중지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에서 분석한 책 <턴어웨이: 임신중지를 거부당한 여자들>에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소개된다. 조사 대상 중 약 3분의 1의 여성이 표현한 가장 흔한 감정은 “단지 호기심에 그걸 보고 싶었고 애착은 없다”거나 “많은 감정이 들진 않았다”처럼 중립적인 것이었다. 10년에 걸친 연구로 임신중지와 관련된 통념을 격파한 저자 다이애나 그린 포스터는 말한다. “임신중지라는 사건이 일어나는지 일어나지 않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여성이 자신의 삶을 계획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다.”

나 역시 몇 년 전, 결혼했지만 아이 없이 살기로 한 여성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중 일부는 임신중지 경험을 들려줬는데, 한 여성은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어땠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생긴 거니까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도저히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상황이었고 임신중지는 “해야만 하는 선택”이었기에 죄책감이 들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임신중지 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는

내가 느끼기에도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래서 “우리 선배 언니는 임신중단 하고도 잘 살던데”라는 영주에게 현이 “애 낳고도 잘 살 수 있어. 그 선배한테는 아마 나 같은 남자가 없었을걸?”이라며 너스레 떠는 걸 보며 생각했다. 죄책감이나 공포, 수치심 없이 임신중지 하고 자신이 계획했던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나기란 낙태죄가 폐지된 지 1년이 더 지난 지금도 왜 이렇게나 어려운 걸까.

최지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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