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시작되자 상하이 황포탄 의거의 주역 김익상의 신원이 신문 기사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기사에 따르면 피고인 김익상의 나이는 28살, 직업은 ‘철공’이었다.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286번지가 그의 본적지였다.
본적지를 생가라고 오인하는 견해도 더러 있다. 하지만 본적지란 호적이 있는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호주의 첫 신고로 새 호적이 편제될 때 지정되는 것으로, 호주의 출생지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위 본적지는 김익상이 결혼해 호적상의 가(家)를 창설할 때 그가 기재해 넣은 신혼 살림집 주소였다.
대지 21평의 조그만 집이었다. 그나마 자기 소유도 아니었다. 집주인은 따로 있었다. 60살쯤 되는 초로의 홍상수라는 사람이었다. 집주인을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김익상은 1919년 7월께부터 자기네 곁방에 세를 들어 살던 세입자였다. 가세가 매우 가난했으나, 성격은 그늘진 데 없이 강렬했다고 한다.1
누추한 단칸방이지만 젊은 아내와 둘이 지내는 호젓한 신혼살림이었다. 아내는 한 살 연하의 송씨 부인이었다. 부부는 이 집에서 아이를 하나 낳았다. ‘점석’이라고 이름 지은 딸이었다. 뒷날 황포탄 거사 이틀 전야에 동지들에게 남긴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는 유언의 주인공이었다.
김익상의 직업을 ‘철공’이라고 지칭한 것은 대체로 사실에 부합했다. 그는 결혼 전후한 시기에 담배회사인 ‘광성(廣成)연초상회’의 기계공으로 취업해 있었다. 이 회사는 매출 규모상으로 손꼽히는 담배 제조·판매 회사였다. 1920년 6월 중 담배 수출·이출 통계자료에 따르면, 광성연초상회는 경기도 안에서 서열 4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출하는 곳은 블라디보스토크, 안둥현, 칭다오, 다롄, 장춘, 하얼빈, 펑톈, 북간도 등이었다.2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 연해주, 중국 만주와 산둥반도 일대가 이 담배회사의 주요 시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1년에 김익상은 광성연초상회 펑톈 지점으로 파견됐다. 식민지 통치당국이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조선에 담배 전매제도를 시행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해 4월1일 조선담배전매령이 공포되고, 7월1일부터 담배 전매제도가 시행됐다. 광성연초상회 경영진은 마케팅 전담기구인 연초도매회사의 주식을 배당받는 방식으로 상황에 대처했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근본적인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전매제도가 미치지 않는 중국 만주시장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김익상이 펑톈 지점 ‘기계감독’으로 발령받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익상은 가족을 데려가지 않았다. 단독으로 국경을 넘어 임지에 부임했다. 가족을 동반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펑톈 파견을 정치적 망명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3·1운동의 체험이 그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3·1운동 당시 그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불길처럼 타오른 그 운동의 세례를 받고 조선혁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김익상은 회삿돈에 손을 대기로 했다. 잎담배 여섯 상자를 빼돌려 창고회사에 갖다 두고, 그 회사로부터 받은 창고증권을 할인해 300원을 얻었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하던 시절이었다. 상층 봉급생활자의 6∼7개월치 급여를 확보했던 것이다. 그는 비행기 학교에 입학하기를 바랐다. 비행기가 독립운동을 위한 선전 활동이나 전투행위에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첨단 기기로 간주되던 때였다.
송씨 부인 입장에서 보면 난데없는 일이었다. 가장이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고 천하를 도모하는 일에 빠져버린 셈이었다. 송씨에게는 생계를 도모할 별다른 재주나 수단이 없었다. 두 살배기 어린 딸을 데리고 거친 세파를 뚫고 나아가야만 했다.
송씨 부인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시집뿐이었다. 그는 본적지의 방을 빼서 ‘이태원리 288번지’에 있는 시집과 살림을 합쳤다. 하지만 시집 살림도 보잘것없었다. 시부모는 돌아가셨고, 3형제 가운데 큰형도 이미 숨진 상태였다. 둘째 김익상이 옥중에 갇혀 있으니, 성인 남성이라고는 남편의 동생 김준상뿐이었다. 다른 식구 5명은 여성이거나 노약자였다.
김준상의 어깨는 무거웠다. 그러잖아도 생활 곤란으로 고통을 겪어오던 터였다. 감옥에 갇힌 형의 남은 식구까지 건사해야 했다. 가진 거라고는 이태원에 있는 조그만 집 한 채뿐이었다. 그는 집을 담보로 어느 일본인에게서 200원을 빌렸고, 그 돈으로 말 한 마리를 샀다. 화물마차 운반용 말이었다. 그는 짐마차 마부가 되어 식솔을 부양했다. 일터는 주로 용산 제탄소였다고 한다. 석탄 운반하는 업무를 도급받았던 것 같다. 김준상의 성실한 노동 덕에 식솔들은 수삼 년간 삶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1924년 여름에 변을 당했다. 무더위 속에서 과중한 짐을 끌던 말이 그만 탈이 났다. 그러다 끝내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 집의 유일한 재산이라 해도 좋을 자산이었다. 다시 말을 살 돈이나, 돈 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김준상은 타인의 말을 빌려 짐마차 노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빌린 말로는 궁핍한 삶이나마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시 한번 빚내서 상황을 타개하려 꾀했다. 채무자는 저당권 설정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 말을 살 수 있게 대부금을 증액해주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기였다. 이미 대출한 돈을 회수하기 위한 일본인 채무자의 사탕발림이었다. 저당권을 설정받은 뒤에도 그자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집의 소유권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집을 뺏긴 것이다. 저 하나 바라보고 목숨을 부지해가는 여섯 식구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김준상은 한탄에 한탄을 거듭했다.
1925년 6월6일이었다. 며칠째 쌀과 소금이 떨어져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말다툼 끝에 아내 이씨 부인이 한강 변에 위치한 친정집으로 식량을 구하러 간 참이었다. 다른 식솔도 밖에 나가서 집이 비어 있었다. 김준상은 마구간으로 사용하던 창고 건물의 들보에 노끈을 걸었다. 그날 오전 11시의 일이었다.
시신은 오후 5시께 집으로 돌아온 아내에게 발견됐다. 얼마간 식량을 구해 귀가한 이씨 부인은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남은 식구는 장례를 치를 형편도 되지 못했다. 며칠간 시신을 집 안에 뉘어놓고 염습도 하지 못한 채 울고만 있었다. 그 모양이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연민을 자아냈던 것 같다. 동네 사람들이 돈을 모아 상여를 산 덕분에 간신히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3
유족은 5명이었다. 아내 이씨 부인, 형수 송씨 부인, 6살 난 조카 점석이, 69살 큰어머니, 큰형의 소생인 조카 기복(基福)이. 집안의 유일한 성인 남성을 잃어버린 이 가족이 과연 무사히 생존해나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뿐인가. 살던 집의 소유권마저 채무자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김익상의 가족에 관한 언론기관의 관심은 1926년까지는 계속 이어졌다. 그해 설날 즈음해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아내 송씨 부인과 딸 점석이에 관한 기사였다. 거주지 주소가 바뀐 게 눈에 띈다. ‘이태원리 280번지’였다. 근저당이 설정된 탓에 채무 미변제로 종전 주거 ‘이태원리 288번지’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가족 수는 4명이었다. 김익상의 아내 송씨, 딸 점석이, 동서 이씨(김준상의 아내), 조카 기복이가 그들이다. 1년 전에 견줘볼 때 연로한 큰어머니가 눈에 띄지 않는다.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겼거나, 아니면 그새 생사가 갈렸던 것 같다.
기자가 물었다. 생활을 어떻게 영위하느냐고. 송씨 부인은 스무 살 조카 기복이가 저울회사에 취직해 벌어오는 적은 돈으로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답했다. 화제가 옥중에 갇힌 남편에게 미쳤다. 김익상은 1922년 11월6일 나가사키 공소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고, 1924년 1월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즈음한 은사령으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상태였다. 송씨 부인은 치마끈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느 때나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만 설을 당하면…” 하고 말끝을 맺지 못했다. 이어서 딸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아요. 이것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라고 답했다. 딸 점석이는 벌써 일곱 살이었다. 설날이라 새 옷을 갈아입고 철 모른 채 웃으며 엄마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해방 뒤 귀국한 의열단장 김원봉은 김익상을 찾았다. 당사자 종적이 묘연했다. 그 대신에 “김원봉 선생께서 찾는 김익상씨는 나의 아저씨입니다.” 조카 김기복이 나타났다. 여전히 이태원에 살고 있었다. 그는 김익상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4
해방 뒤 공동체 성원의 도덕적 의무사형선고를 받은 김익상이 일본 황태자 결혼, 일황 즉위 등을 계기로 세 차례 감형받았고, 결국 13년 감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에 출옥했다는 이야기. 출옥 이후에도 예비검속, 요시찰 감시 등으로 고통을 겪었다는 이야기, 1941년 8월 노량진에서 용산경찰서 경찰과 조우해 격투를 벌이다 다시 수감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고 한강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 등을 증언해주었다. 김익상의 최후는 아마도 사상 전향과 예방구금제도 시행에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41년 2월 공포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에 따르면, 만기 출옥한 시국 범죄자로 사상 전향에 응하지 않는 자는 언제라도 다시 감옥에 수감돼야 했다.5
딸은 어떻게 됐는가? 유감스럽게도 김기복은 김익상의 아내와 딸 소식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았다. 과연 김익상은 그의 가족과 재회했을까? 자기 한 몸과 가족을 희생해 피억압 동포의 해방을 꾀한 한 독립운동가의 마지막 유언은 끝내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던 것 같다. “딸을 공부시켜 여성 혁명가가 되도록 교도하기를 부탁한다.” 이 유언을 이행해야 할 사람은 이제 의열단장 김원봉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해방된 세상에 살고 있는 공동체 성원들이 마땅히 지키고 이행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되고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金益相의 본가는 시외 孔德里로 판명’ <동아일보> 1922년 4월6일
2. ‘객월 製煙 이출액’ <동아일보> 1920년 8월1일
3. ‘불운아! 김익상의 實弟가 縊首 자살’ <동아일보> 1925년 6월9일, ‘김익상 弟 자살’ <조선일보> 1925년 6월9일, ‘田中대장 저격 범인의 實弟 자살’ <京城日報> 1925년 6월20일
4. ‘옥중 생활로 轉身하며 조국 해방에 바친 일생’ <조선일보> 1945년 12월5일
5. 장신 ‘1930∼40년대 조선총독부의 사상전향 정책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2020년, 146∼164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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