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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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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프레임의 세계를 다시 보여주는 영화기자 [21WRITERS②]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쓴 김혜리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2 07:46 수정 2022-03-24 01:57
김혜리의 서재. 정멜멜 작가

김혜리의 서재. 정멜멜 작가


*김혜리,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영화를 보았다 [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56.html

영화

모든 영화는 각기 다른 종류의 글을 쓰고 싶게 해. 어떤 영화는 귓전에 격문을 불러줘서 받아쓰게 되고, 또 다른 영화는 기도문을 짓고 싶게 만들어. <늑대아이>를 처음으로 본 저녁에 나는 아직 작곡되지 않은 노래의 가사 같은 걸 끄적이고 싶었어. -영화 <늑대아이>를 적으며,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영화 저널리즘은 무엇입니까?

“내가 이 영화를 보고 판단한 미적 판단을 씁니다. 다만 저널리스트가 일반 관객과 다른 점이라면 소통 가능한 언어를 써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보편성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미적 판단이란 의미는 아니에요. 그래도 나만의 것으로 남아서는 곤란합니다. 그러기 위해 작품과 영화에 대한 근거 있는 관찰이 있어야겠지요. 그게 쌓이다보면 읽는 분들이 ‘아, 이 사람 필터를 통해서는 영화가 이렇게 쓰이는구나,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이렇겠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림과 영화를 설명하는 묘사의 문장은, 어떻게 탄생합니까?

“보는 순간에 떠오르는 게 있으면 메모하겠지만 그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많지 않고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이걸 읽는 사람한테 어떻게 제일 비슷하게 전하나 생각합니다. ‘아, 이 느낌은 아닌데 그럼 부사 하나를 더 넣어야 할까’ 그러다가 ‘아냐 그럼 딴 단어일까. 이게 근사치인 것 같아’ 하면서 조그 셔틀 돌리듯이 이렇게(손짓) 맞춰보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샌 단어도 잘 안 떠올라요. 설명하기 어렵군요.”

생체 시계를 압도하는 세상의 어지러운 속도에 대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묘사’를 하는 것이다. -화가 빌헬름 사스날의 그림을 설명하며, <그림과 그림자>

-다량의 사전을 보유하고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그 다이얼을 돌릴 때 사전의 도움을 받나요? (허문영 영화평론가는 “(김혜리의) 책상 위에는 늘 국어사전과 함께 소설가의 책상에나 어울릴 법한 유의어사전이 있다”고 적었다.)

“떠오르지 않을 때 사전이 도움 되지는 않고요. 내가 알고 있는 뜻이 맞는지 확인하고 안심하는 정도입니다. 아니면 한 단어를 너무 자주 썼을 때 비슷한 말을 찾아보죠. 사전을 뒤져가면서 글 쓴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냥 사전을 좋아할 뿐입니다. 물욕이 있어요. 자꾸 사요. 그림 사전, 질병 사전, 음악 용어 사전, 어린이를 위한 사전, 자동차 사전 등이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 메모를 무척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는 그대로를 적나요? 떠오르는 생각을 적나요?

“둘 다 있습니다. 이야기할 숏을 급히 그리기도 합니다. 깜깜한 극장에서 그린 것이니 나중에 보면 ‘대체 뭐지?’ 하지요. 떠오른 생각도 적습니다. 장면을 묘사할 어느 소설이 떠올랐다, 그러면 적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설 제목이 생각 안 날 때도 많은데… 그럼 제목 대신 소설에 관해 떠오른 것을 막 적어놓습니다. 이런 습관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다 쓰지 말고, 거르자고 다짐합니다. 보면서 메모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영화를 본 다음에 돌아와서 바로 또박또박 정서해두는 것입니다. ‘보고 나서 바로 정리하자’는, 그러나 만년 새해 결심일 뿐입니다.”

김혜리의 쓰는 손. 박승화 기자

김혜리의 쓰는 손. 박승화 기자

-영화 혹은 인물과 관련된 자료를 엄청나게 모아 글을 쓰는 것으로 또한 유명합니다. 그런 자료를 어떻게 보고, 분류합니까?

“저는 통찰력이 없어요. 그리고 축적이 안 됩니다. 툭 치면 툭 하고 영화 정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쓴 기사도 까먹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나오면 그 감독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다 봐야 해요. 자료를 많이 찾았다면, 그건 하루살이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리에는 체계가 없습니다. 가령 마틴 스코세이지를 찾을 때 감독 폴더 들어가서, 미국 폴더 들어가면 딱 나오는, 그런 정리를 저는 못합니다. 오히려 충동적이고 우연한 연결이 많아요. 퍼뜩 떠오르거나, 관계없이 책장 앞을 서성대다가 무심코 책을 펼쳐 봤을 때 우연히 연결될 때가 많습니다. 논리적으로 분류되지 않는, 몇 칸 떨어진 곳에서 문장을 떠올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왼쪽 창에서 스며드는 백포도주 같은 햇빛과 문설주가 그리는 테두리 안에 들어앉아 명상 같은 노동에 몰입해 있는 베르메르의 여인들은 우리를 조바심치게 만든다. -영화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를 적으며, <영화야 미안해>

-신형철 평론가는 “그(김혜리)의 어휘, 수사, 리듬 등에서 나는 나를 거슬리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해내지 못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런 글은 쓰는 과정조차 명상하듯 부드러울 것 같습니다. 쓰는 풍경 궁금합니다.

“아이디어와 자료 메모가 적힌 창, 기사 작성 창 두 개를 띄우고 밀고 덜고 하는 과정입니다. 명상은 아닙니다. 쓰는 과정은 괴롭습니다. 대단한 예술작품 창작이나 학문 연구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도취되기도 하고, 게으르게 미루다가, 때려 붓다가… 5시간 쓰면 5분 정도 순간적으로 좀 써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키보드로 피아노 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쓴 글을 다 지워버리기도 하지요. 다만 기사를 넘기면 무엇도 줄 수 없는 행복감은 있습니다. 주간지 기자로 작은 성취를 주 단위로 한다는 것, 거기에 중독되는 건 위험합니다. 장기적인 호흡으로 무언가 한다거나, 매일매일 하루를 잘 살아내지 못해요. 몸에도 좋지 않은데, 또 자기 몸을 해치며 오는 쾌감이…. 그렇다고 <씨네21>에서 일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난 원래 게으른 인간인데 이런 극한 조건에 있으니까 뭐라도 짜냈다고 생각합니다.”

김혜리

-영화와 얽혀서 살겠구나 생각한 20대 초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학교 2학년 방학 때, 학교에서 못해볼 것 같은 일을 찾아다녔는데 그때 서울 대학로에 영화학교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는 영화 복제본을 빌릴 수도 있고 영화에 대한 강의도 들었는데, 재밌었습니다. 그즈음 절대적인 가치를 찾는 건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아름다운 걸 많이 보는 게 장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초 인간, 시간 속에 있는 인간, 그 인간이 다른 인간과 주고받는 영향에 흥미가 있어서 서양사학과를 갔는데 영화도 그와 흡사했어요. 언어와 이미지로 구성된 영화처럼, 영화 글을 쓰고 이미지를 붙여 잡지로 만드는 일이 재밌을 것 같았고요.”

맨 처음 글을 쓰게 만든 완전한 몰입과 사랑의 기억이 개기일식만큼 드문 것임을 배운 뒤에도 나는 왜 멈추지 않았을까.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가 맞는 대답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있었다면 그것을 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디 아워스>를 적으며, <영화야 미안해>

-더 어린 시절, 자기 감정을 말로 정리하고 스스로한테 설명하는 아이였나요?

“말은 지금도 그렇지만 잘 못했는데요.(동의할 수 없는 청자가 많겠으나 넘어가야 한다.) 어쩌다 말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잘 말해보려다가 더 긴장했어요. 자기 전에 혼자 중얼중얼은 많이 했다고 합니다. (중얼중얼이라면… 역시 표현 욕구가 큰 아이였을까요?) 글쟁이들이라는 기획 취지로 접근하셔서 나올 법한 오해군요. 저는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초등학교 나오면 한글은 떼잖아요. 다른 기술이나 자격증도 없고 밥벌이는 해야 하는데. 먹고살 수 있는 것 중에 할 수 있는 게 글 쓰는 일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소극적인 선택을 계속해온 거지요. 글재주가 있다고 느끼고, 그래서 글을 쓰게 된 순서는 아닙니다. 소설이나 시 같은 것을 쓴 적도 없고요.”

사람, 글, 영화, 김혜리

-사람과 영화에 대해 김혜리의 글을 읽고서야 ‘아, 내가 느낀 감정이 이런 거였어’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영화 속 상황이나 인물의 입장은 보시는 분 모두 헤아리고 계시지만, 글로 정리해 발표하지 않을 뿐입니다. 다른 일들로 바쁘시잖아요. 저는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게 직업이고, 거기 공감해주시는 것입니다. 기회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팟캐스트 <필름클럽>에 다음번 소개할 영화를 말씀드리면 ‘듣기 위해서 보러 간다’는 전자우편이 옵니다. 저는 이게 직업인데도 극장 한 번 가는 것을 힘들게 여기고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냥 내 얘기를 재밌게 듣고 싶어서, 돈을 쓰고, 두 시간 반짜리 영화를 보고, 팟캐스트를 들어주신다는 건 기적 같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보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그 마음 앞에서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게을러지는 스스로가 죄스럽기도 하고, 내가 뭐라고 내 글과 말에 가치를 부여해주실까 싶기도 합니다.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도 듭니다. 세상에는 좋은 삶에 진심인 분이 무척 많습니다.”

“내 인생은 마치 누군가의 기억인 것 같아.” 메이슨의 삶이 어쩌다 내 기억이 되었을까? 나는 어리둥절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영화 <보이후드>를 적으며,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다룬 김혜리의 글과 말을 따라가다보면 사람은 과연 복잡하고 깊은 존재라고 깨닫게 됩니다. 사람과 영화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실제 삶에서 타인을 인내심을 가지고 골고루 깊게 보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저는 이렇게(손으로 네모 프레임을 그리며) 보아야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주변을 쳐내고 클로즈업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에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죠. 영화를 보거나 인터뷰할 때는 사람의 상태라든가, 카메라의 기분을 무척 헤아리려고 해요. 테두리가 주어져야 비로소 사람에 대해 좀더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좀 생각하지요.

어쩌면 한심한 이야기입니다. 실제 삶을, 글처럼 살지 못합니다. 영화 그만 보고 삶을 살라고 이야기할 수 있고 맞는 말입니다. 다만 저는 어쩌다 이런 직업을 가지고 이렇게 살게 되었네요.”

에필로그

대통령선거 이틀 뒤 만났다. 마음 한쪽이 서걱거렸다. 김혜리는 적었다. “예술도, 철학도, 종교도 세계를 직접 개선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이 세계를 개선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지해준다. 이것은 엄연히 실질적이며 위대한 힘이다.”(<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264쪽) 문장을 쥐고 위대한 힘을 지닌 책과 영화, 무엇이든 추천을 부탁했다. 추천작의 메시지는 소박했다.

“우선 작가는 커트 보니것, 명언 제조기입니다. 그 가운데 ‘안녕 아기들아. 지구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여기는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둥글고 축축하고 번잡하다. …내가 아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젠장, 친절해라”’ 하는 문장(책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가운데)이 떠오릅니다.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입니다. 연대라는 것이 예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시대에, 영웅주의나 승리의 쾌감을 배제하고도 잘 사는 삶을 스스로한테 물어볼 수 있는 영화예요. 우리 모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잖아요. 좋은 삶이라면 다시 커트 보니것. 서로한테 상냥하게 대하고, 돌봐주며, 하루하루 잘 지내는 기쁨을 느끼려고 온 것이겠죠.”

덧붙여. 김혜리가 좋아하는 작가는 커트 보니것을 포함해 윌리엄 사로얀, 존 스타인벡, 존 어빙,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래스, 마거릿 애트우드, E. M. 포스터 그리고 박완서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

http://h21.hani.co.kr/arti/SERIES/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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