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한창때의 밭 풍경. 오른쪽 위에 보이는 구역부터가 모두 고춧대다. 수확을 마친 고춧대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멀리서 한 사내가 계속 지켜보는 듯했다. 그것만 빼면 별다를 것 없는 저녁이었다. 말려뒀던 고춧대를 태우고 있었다. 수확을 마친 고춧대는 애물단지다. 다 자란 고춧대는 작은 나무 같다. 뽑아내기엔 뿌리가 깊고, 흔들리고 쓰러지지 말라고 조조의 연환계(배를 묶어놓는 계책)처럼 줄로 고춧대들을 연결해놓다보니 정리하기가 여간 수고롭지 않다. 묶인 줄을 부탄가스 토치로 태워 고춧대들이 쓰러지면 일일이 낫으로 베어내야 한다. 베어낸다고 끝이냐. 아니다. 농달(지난 내용 참조)은 “삼촌 그거 같이 태우게 베어서 밭 한 귀퉁이에 가지런히 세워 말리라”고 했다.
주말에만 밭일하다보니 태우는 날을 잡기가 까다로웠다. 젖으면 태울 수 없다. 가을장마가 길었던 탓에 고춧대는 늘 젖었다. 포천은 서리까지 일찍 내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늘 젖어 있었다. 그날이었다. 마침 주중에 비도 오지 않았고 서리도 거의 없던 날이었다. 농달은 오늘이 천지변환의 결정적인 계기라는 듯 “삼촌 이따 고춧대 태워요” 진격의 영을 내렸다.
오전에 고춧대를 풀어 말렸고 드라마 재방송이 끝날 때까지 뭉그적거리다가 고춧대를 태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불이 번질까 겁나 소각통에서 태웠다. 그런데 바람이, 동남풍이 불지 않아 자꾸 불이 꺼졌다. 밭에 널어놓고 태워야 하나를 고민하던 때 농달이 거침없이 밭에 불을 놓았다. 밭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농달의 고춧대들이 타올랐다. 연쇄적 고리를 이루며 사람 키만큼 높은 화마가 일었다. 과감하달까, 농사의 짬에서 오는 바이브가 느껴진달까 여하튼 화끈했다.
‘저렇게 해도 되는 것이군.’ 소각통에 꽉꽉 욱여넣었던 고춧대들을 다시 꺼내 밭에 펼치고 불을 댕겼다. 그때 멀리서 지켜보던 사내가 나타났다. “사장님, 고춧대 이렇게 태우시면 안 됩니다.” “네, 누구시죠?” “산불감시원인데요. 고춧대 태우시면 안 돼요.” “네,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게, 태우는 것 말곤 방법이 없긴 한데…. 여튼 제가 9시부터 6시까지 근무인데 말씀 안 드릴 수도 없고 방법도 없긴 한데, 보통 새벽에 태우거나 해 지고 태우는데 여튼 태우시면 안 됩니다.” “아… 네… 근데 밤에 태우면 더 위험할 것 같아서요.” “저는 일단 말씀드렸습니다.”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문답이 오가는 동안 농달 밭의 고춧대는 이미 한 줌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산불 예방을 위해 고춧대나 깻대 같은 농산폐기물을 태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전히 태우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산불감시원은 시청으로 가져가면 “갈아서 버릴 수는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시청까지 고춧대를 실어가려면 용달차를 불러야 하고, 운송비가 족히 15만원은 들 것 같은데. 기사를 찾아보니 농산폐기물 퇴비화 사업 시행으로 3월 말까지 수거 신청을 받는다고 한다.
고춧대를 나르며 불이 붙는 과정을 신나게 지켜보던 6살 막내는 “아빠, 그러니까 이걸 태우면 어떡하냐. 산불 날 수도 있는데. 아빠는 이에스지(ESG)도 모르냐?”고 나를 힐난했다.(와이프가 사회공헌, 사내 ESG 담당자다.) 네가 ESG를 아니.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고춧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 환경적 위험 요인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에도 모두 태워버리는데. 사회적 해법을 더 정교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ESG적인 고추농사는 불가하니 내년엔 짓지 말아야 할까.
글·사진 김완 <한겨레> 스페셜콘텐츠부 탐사기획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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