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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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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자 상팔자

기획하고 책도 만들어야 하는데 봄부터 감자 생각만
등록 2021-09-04 15:11 수정 2021-09-10 02:02
감자밭에 농약을 뿌리던 중 한 컷. 돌이켜보면 이때도 행복했네.

감자밭에 농약을 뿌리던 중 한 컷. 돌이켜보면 이때도 행복했네.

감자 심는 건 쉽다. 감자 심는 데는 더 이상 발전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최적의 도구가 있다. 우산처럼 생겼는데 양쪽에 손잡이가 달렸다. 손잡이를 모아 쥐면 우산 꼭지 부분의 금속으로 만든 입이 벌어진다. 한 사람이 우산 꼭지를 땅에 쿡 찔러넣은 다음 입을 벌려주면, 또 한 사람이 씨감자를 우산 속에 쏙 넣어준다. 모아 쥐었던 손잡이를 제자리로 다시 벌리며 우산을 빼면 감자가 들어간 구멍 위로 흙이 덮인다. 간혹 잘 덮이지 않으면 씨감자 넣어준 사람이 두둑을 발로 툭 차서 흙을 덮어준다. 쿡, 쏙, 툭. 쿡, 쏙, 툭.

감자를 심고 나면 몇 주는 그다지 할 일이 없다. 지난해 처음 감자를 심고는 과연 싹이 날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우리랑 비슷하게 심은 옆 밭은 싹이 올라왔는데, 우리 감자는 소식이 없다고 하니 이장님이 다 나게 돼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심고 나서 2주가 되니 정말 땅을 뚫고 감자 싹이 돋았다. 그다음부터는 주말에 갈 때마다 쑥쑥 자라 한 달 반 정도 지나니 하얀 꽃이 피었다. 돌이켜보면 이때가 멋모르고 제일 행복했다.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라기에 풀 관리를 한다고 고랑에 제초제도 한 번 쳐줬다. 여름휴가를 다녀왔더니 풀이 허리까지 자라 있다. 약은 한 번만 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올라오면 치고 올라오면 또 치고 하는 거란다. 고랑뿐 아니라 감자가 올라온 멀칭 비닐의 구멍 속에서도 억센 풀이 무성히 자랐다. 이장님이 감자 구멍에서 올라온 풀에는 약을 칠 수도 없고, 뽑으면 감자가 흔들려서 안 되니 전지가위로 풀을 잘라주란다. 풀 중에 제일 악질은 덩굴이다. 두 종류가 있는데, 잎이 다섯 갈래인 놈하고 잎이 작고 붉은색이 섞인 놈이 있는데, 둘 다 가시가 있어 걷어내자면 사정없이 할퀸다. 그렇게 여름이 지났다.

가을이 돼 감자 캘 사람을 불러 모았다. 친구와 친구의 동료, 동료의 남편, 언니와 형부와 언니네 시어머니…. 몇 주에 걸쳐 올 수 있는 사람은 다 모아 캤다. 심을 때는 캘 때를 생각 못했고, 캘 때는 감자를 어찌 처리할지 계획이 없었다. 팔자니 모호한 양이고 먹자니 너무 많다. 감자를 캐준 파티원들에게 한 상자씩 답례하고, 친구들과 작가님들한테 부쳐줬다. 남편은 손님들한테 나눠주고 점심을 배달해 먹는 식당에도 드렸다. 감자 맛있다는 소리에 돈 들여 시간 들여 힘 들여 농사지은 보람이 느껴졌다. 남편은 점심에 감자 반찬이 나오면 우리 감자라며 반가워했다. 돌이켜보면 이때도 행복했었네.

그리고 올해. 작년의 세 배 이상 규모로 감자를 심었다. 멀칭부터 씨감자 고르기, 심기, 풀 관리 모두 세 배 이상 힘이 들어갔다. 올해는 지난해의 경험을 살려 풀 관리도 더 열심히 하자 다짐했건만, 여지없이 풀은 쑥쑥 올라와 여름엔 내내 낫을 들고 풀을 베어야 했다. 감자순이 모두 주저앉고 나서는 아예 예초기로 풀을 밀었다. 올해는 돈이 들더라도 사람을 써서 수확하려고 주변에 인력을 구해달라 부탁했다. 마을 L사장님이 사람 쓰면 손해라고 극구 말렸다. 멀칭 비닐만 벗겨놓으면 트랙터로 캐줄 테니 사람들 모아 와서 주워 담으라 조언했다. 지난주에 비닐을 벗겨놓으려 했는데 가을장마라 한 주 미뤘다. 이번주에 벗겨놓으면 다음주에 주워 담아야 하는데, 그 주엔 도서전에 가야 한다. 그다음 주는 추석이다. 더 미루면 풀은 또 사정없이 올라올 텐데.

봄부터 감자 생각만 하며 살았다. 기획도 하고 책도 만들고 마케팅도 해야 하는데, 그놈의 감자 걱정이 머릿속에 꽉 찼다. 무감자 상팔자다.

글·사진 김송은 송송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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