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주먹이 매웠던, 그러나 이제는 주먹보다 수염이 더 멋있어진 옛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이 이런 말을 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애초 계획은 이랬다. 2020년 여름 아이들과 경기도 포천 이동면에 있는 백운계곡으로 글램핑(고급스럽고 편리한 물건들을 갖춰놓고 하는 야영)을 갔다. 도랑 치고 피라미 잡고 재밌게 노는데 아내가 불쑥 말했다. “이 동네 너무 좋지 않아? 엄마(장모님) 귀농하는 시골집 여기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
아내는 집에 돌아가기 전에 여기 집이나 한번 보고 가자고 했다. 백운계곡이란 명성에 비해 동네가 사뭇 호젓하단 생각을 하던 터라 선뜻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몇 집 안 보고 가려는데 운명의 그 집을 소개받았다. 부동산 중개업자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표정으로 “동네 사람한테만 파는 집”이라고 했다.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에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이 자리를 잡고 있던, 무엇보다 ‘갓’ 지은 집이었다. 남들은 끌어모아 서울 강남이나 목동에 묻어둔다는 영혼을 그렇게 우리는 포천의 땅과 집에 바치기로 했다. 포천이면 ‘포춘’ 아니냐며, 앞에는 백운계곡이 흐르고 뒤로는 백운산이 감싸주니 이것은 ‘더블 헌드레드 포춘’이 아니냐고.
집 마당엔 곱게 깔려 있던 잔디. 맞다 그 잔디가 문제였다.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 비겁해진다던가 용감해진다던가. 그 잔디밭에 예쁜 테이블을 놓고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려 마셔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해시태그도 생각했다. 땅거미가 앉으면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보던 그런 ‘힙 조명’을 켜고 바비큐를 먹어도 좋겠구나. 애초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그런 것이었다.
집 옆에는 땅이 붙어 있었다. 100평의 밭. 처음엔 그냥 잔디를 깔지 않은 땅으로 구별했다. 갓 지은 집과 잔디가 곱게 깔린 땅과 그렇지 않은 땅. 그 밭에는 낯익은 깨가 심겨 있었다. 땅이 노는 것이 아까워 마을 노인회장님이 집을 관리해주며 소일 삼아 짓는 것이라고 했다. ‘역시 100평 정도는 소일 삼아 짓는 것이군.’ 집주인은 깨는 가을에 털 것이니 텃밭 농사는 내년부터 지으면 된다며 “농사는 지어보셨죠?”라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농사를 지어보았고, 짓지 않기도 했다. 몇 년 전 회사 선배들이 공동으로 하는 텃밭에 한 이랑을 분양받아 깔짝깔짝 뭘 좀 심어보기는 했다. 그때 알았다. 한 이랑이 얼마나 광활한 대지인지. 비만 오면 풍년 드는 줄 알던 서울놈에겐 한 이랑 밭농사 도전은 용감무쌍한 짓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새싹과 잡초를 구별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씨를 뿌릴 때, 올라오는 새싹이 무엇의 종자인지 적어놓지 않아 당최 알 길이 없는 ‘초록이’들이 죄 신비로웠다. 봄볕이 강해지고 나서는 내가 텃밭을 분양받은 것인지 잡초의 발육에 땅을 기부하고 있는 것인지, 이게 노동으로 극복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를 딱하게 여겼는지 아니꼬웠는지 옆 이랑을 정갈하게 관리하던 선배는 “나는 텃밭을 분양받았는데 너는 초원을 분양받았구나. 네 밭을 보면 좋아. 웅장해져. 기상이 생겨”라고 했다. 선배, 저는 주말농장이 아니라 주막농장을 했던 것입니다.
한 이랑에서 100평으로. 그렇게 겁이 없어 용감했는지 무식해서 감이 없었는지 여하튼 잔디밭에서 커피나 한잔하려고 시작한 서울놈에게 바다처럼 넓은 밭이 생겼다. 장모님은 밭 절반에 고추를 심고 둘레에는 감자, 고구마, 호박이나 좀 심는다고 했다. 남는 땅에 가지와 토마토를 조금 심자고 했다. 그래도 아쉬우니 파나 파프리카도 심겠다고 했다. 아이들은 채소를 왜 먹느냐며 수박과 참외를 키워 먹자고 했다.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다. 그것들을 심기 전까지는.
글·사진 김완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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