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별하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구제하는 최후의 보루다. 오늘날 형사재판의 대원칙 중 하나는 진범을 가리고 억울한 피해자나 범죄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증거재판주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과학수사’다. 그러나 현실에선 과학수사와 증거재판이 되레 ‘억울한 죄인’을 확정할 위험이 상존한다.
미국 법학자 브랜던 개릿이 쓴 <오염된 재판>(신민영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은 ‘죄 없는 사람들을 유죄 판결하기’(Convicting the Innocent, 책 원제)의 실태와 이유를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한 책이다. 지은이는 미국에서 살인·강간·강도 등 중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유전자(DNA) 검사로 결백을 입증한 250명의 사례 분석으로 형사사법 절차의 치명적 허점을 짚고 제도 개선을 촉구한다.
1993년 10월, 강간·살인 혐의로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로널드 존스는 형 집행을 눈앞에 두고 살아났다. 사건 12년 만에 주대법원이 예심법원의 결정을 뒤집고 허용한 DNA 검사에서 결백이 입증됐다. 존스는 지능이 낮은 알코올중독 노숙인이었다. 연방대법원은 존스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의 유죄 판결은 수사관이 교묘하게 세뇌해서 나온 자백뿐 아니라 ABO식 혈액형 검사, 법과학 분석관의 그럴듯한 엉터리 증언 등 과학수사로 뒷받침됐다. 재판 과정에서 결정적 유죄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오판의 덫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피해자 250명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게다가 극히 드물게 운이 좋은 경우다. “항소심 및 재심에서 DNA 검사를 원하는 기결수 대다수가 검사를 받을 수 없”고, 무죄 입증은 경찰·검사·판사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나마 운이 좋았던 250명 중 17명이 사형, 80명은 종신형이었다. 이들은 평균 13년 억울한 옥살이를 했고, 무죄 입증까지 평균 15년을 싸워야 했다.
한 피해자는 여성 고소자가 남자친구와의 성관계 사실을 부모에게 감추려 허위 신고를 하는 바람에 12년을 복역했다. 이 재판의 법과학자는 단 이틀간 공개강좌를 들은 게 전부였다. 사형 선고 사건의 재판이 이틀 만에 끝나거나, 피고인이 사망한 뒤에야 결백이 밝혀진 경우도 있었다.
지은이가 책의 각 장에서 던진 질문은 현행 형사재판 시스템의 한계와 과제를 폭넓게 아우른다.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는가. 왜 피해자·목격자·제보자는 거짓 증언을 할까. 왜 과학수사는 진실을 밝히지 못했나. 왜 변호사는 무고한 의뢰인의 유죄 판결을 막지 못했나. 왜 항소심 또는 인신보호 절차는 무고한 사람을 석방하지 못했나. 왜 무고한 사람의 결백 입증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까. 지은이는 신문 및 범인 식별 절차와 법과학의 개혁, 수감자의 제보 남용 방지, 검찰과 국선변호제도 개혁 등 구조적 사법개혁의 시급함을 강조한다.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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