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우주의 역사에 맞먹는 ‘배드 가이’

구글 ‘크리에이티브랩’의 ‘무한한 배드 가이’
등록 2020-12-21 23:56 수정 2020-12-22 00:05
https://billie.withyoutube.com/

https://billie.withyoutube.com/

나이키 캠페인 영상 갈무리

나이키 캠페인 영상 갈무리

구글에 대한 여러 평가에서 애플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을 기반으로 세계 1·2위를 다투는 기업이니 당연하겠지만, 특히 디자인이나 예술 감각에 대해선 애플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구글도 애플만큼 ‘크리에이티브’를 사랑한다. 단지 그 사랑 방식이 조금 다를 뿐.

구글에는 ‘크리에이티브랩’이라는 조직이 있다. 음악·미술·공부·글쓰기 4개 분야에서 자유롭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같은 기술을 활용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조직에서 최근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 <배드 가이>를 두고 재미있는 이벤트를 벌였다. <배드 가이>는 2020년 11월 유튜브에서 10억 뷰를 기록했는데, 구글 크리에이티브랩은 자기 방식으로 헌사를 전했다.

알다시피 유튜브는 원곡뿐 아니라 그 곡의 커버(모방) 버전이 무수히 많다. <배드 가이>의 커버 버전은 대략 1만5천여 편이다. 여기에는 커버 연주와 댄스뿐 아니라 고양이 울음소리를 편집한 영상, 애니메이션 영상, 수화, ASMR 등이 모두 포함된다. 구글 크리에이티브랩은 머신러닝을 이용해 이 영상들을 나노 단위로 분석해 곡의 어떤 부분에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무한한 배드 가이’(Infinite Bad Guy)를 공개했다.

일단 ‘billie.withyoutube.com’(그림1)에 접속하면 <배드 가이>의 원본 뮤직비디오가 먼저 등장한다. 음악을 듣다가 아무 때나 다음 영상을 클릭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음 곡이 연결된다. 자동재생을 클릭하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랜덤으로 다음 곡을 이어붙인다. 뭐가 나올지는 모른다. 1만5천여 개 소스에서 수학적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는, 사실상 우주 역사와 맞먹는다. 머신러닝은 사용자가 클릭하는 순간의 음악적 특징을 분석한 뒤 수많은 커버 속에 동일한 패턴을 찾아 매칭한다. 어떤 영상도 한 번 이상 재생되지 않는 방식으로 <배드 가이>는 무한 반복된다.

나이키가 11월, 코로나19 시대의 스포츠에 대한 메시지를 담아 화제가 된 캠페인 영상(그림2)도 비슷하게 계속된다. 다양하고 드라마틱한 스포츠의 순간들이 좌우로 분할된 화면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하지만 이 놀라운 1분30초짜리 영상은 일일이 한땀 한땀 제작한 것으로 43일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반면 ‘무한한 배드 가이’는 무작위로 커버 영상을 찾아 연결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무한한 배드 가이’는 구글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이벤트다. 구글의 머신러닝 기술 수준을 보여주면서도 더없이 재미나다. 알고리즘, 빅데이터, 머신러닝 같은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무한한 배드 가이’는 이런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기술용어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게 한다.

머신러닝이든 인공지능이든 이런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최신 가전제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엔터테인먼트도 된다. 기술 기반 사회에서 기술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거기엔 음악과 엔터테인먼트가 크게 기여한다. 대체로 불안과 우울함이 배회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흥미진진한 신세계다.

차우진 칼럼니스트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