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를 나와서 미국 아이비리그(미 북동부에 있는 8개 명문 사립대학)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석사를 한 뒤 미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에 합격했다. 역사학을 공부한 뒤 법조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하던 밴드 활동의 연장선에서 음반도 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미활동이었다. 하지만 2016년 발매한 2집 《혁명가》가 서울 광화문 촛불광장에서 울려퍼지고 대중의 뜨거운 반응을 받으면서 로스쿨 합격증을 내던지고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내친김에 성균관대 앞 폐업 위기의 사회과학 서점 ‘풀무질’을 인수하고 독립출판사 ‘두루미’도 운영하면서 채식주의자를 위한 사찰음식점 ‘소식’을 열었다. ‘양반록’의 창시자인 록밴드 ‘양반들’의 리드보컬 전범선(28·사진)씨는 본인이 ‘금수저’임을 인정하면서 ‘금수저’의 길을 내팽개친, 한국에선 낯선 이력의 소유자다. 최근 음반 《엑시트》(Exit)를 내기도 한 그에게 ‘행복’을 묻기 위해 서점 풀무질을 찾았다.
내 음악에 반응한 촛불혁명학자나 교수, 법조인의 길을 갈 수 있었는데, 왜 가지 않았나.
옥스퍼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해보니 박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들이 안락하게 살고 있지만 내가 동경하는 삶은 아니었다. 학자들이 대중과 유리돼 서로 논문을 인용해주고 그것에 목숨을 거는 생태계에 실망했다.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에 합격한 뒤 한국 법무부에서 잠시 일했는데, 거기서도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느꼈다. 법조인이라는 직업이 질서유지가 우선인 보수적인 집단이고, 사상이나 문화예술계에서 바뀐 사조를 뒤늦게 법이 통과되면 적용하는 일을 하는, 역사의 진보에 끌려가는 집단이라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렇게 역사학자와 법조인의 길에 회의를 느끼던 차에, 가장 결정타가 됐던 건 2016년 낸 《혁명가》 음반이 대중과 평단의 관심을 받고, 광화문의 촛불혁명에서 사람들이 내 음악에 반응하고 다르게 해석하는 걸 보면서 진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혁명가》를 냈을 때만 해도 취미로 음악을 했는데, 그걸 계기로 가수를 본업으로 하게 됐다.
그럼 학창 시절 꿈은 뭐였나.
국제변호사였다. 미국 학부엔 법학이 없고, 로스쿨을 가기 전에 역사학을 많이 전공한다. 중·고교 때 역사를 좋아하기도 해서 다트머스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컬럼비아대학 로스쿨에 합격했다. 학부를 1년 빨리 졸업해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1년짜리 석사과정까지 밟았다.
원래 꿈에서 방향을 틀었을 때 내적 갈등은 없었나.
2016년 촛불혁명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당시 진로를 틀 땐 고민이 전혀 없었다. 민사고 출신이 대부분 로스쿨 아니면 메디컬스쿨을 가는데, 평생 동기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끔찍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후 ‘내가 10년 뒤 동문회에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실존적인 고민이 가끔 들긴 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재미있게 살고 있긴 한데, 재미있게 살려면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돼야 하니까 혹시 하는 불안감이 약간 있다.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
변호사를 하면서 음악을 하면 어떻겠냐고 하시긴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평생 공부하라고 하신 적도 없었고, 기본적으로 자식을 믿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스타일이셔서 큰 갈등은 없었다. 어머니도 젊은 시절 밴드 활동도 하고 책방도 하셨다. 내가 어머니가 하신 걸 똑같이 따라 해서 뭐라 하실 수도 없다. (웃음)
민사고, 아이비리그를 거쳤다. 자신이 금수저인 것을 인정하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에서 자동차부품 대리점을 운영하셨다. 내가 민사고를 다닐 때 그곳 학부모는 대부분 교수, 의사, 대기업 임원이었다. 민사고 국제반에서 강원도 출신은 나 하나였다. 대부분 학생이 서울 강남 출신으로 서로 아는 사이여서, 나만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간 듯한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내가 무슨 금수저냐 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민사고 학비도 몇천만원이고 아이비리그 학비도 몇억원이 된다. 그런 점에서 내가 금수저라는 걸 부정하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민사고의 주류 학생들과 집안 배경이 달라서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았나.
지금까지 인생이 늘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가는 경험이었다. 민사고는 대한민국 변방에서 중심으로 들어가는 경험이었고, 미국 대학 진학은 미 제국주의 변방에서 중심부로 들어가는 경험이었고, 옥스퍼드대학 진학은 그보다 더한 느낌이었다. 카투사(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로 복무할 때도 ‘이등시민’으로서 차별받았고 분노를 느꼈다. 그런 경험이 열등감을 자극하기보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변방의 관찰자로서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을 길러줬고, 내가 하는 많은 일에 동력이 돼줬다.
진짜 금수저들은 자신이 금수저임을 인정하지 않고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조국 사태’ 때 서울대·고려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시위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서 이른바 명문대를 다니면 사실상 특권계층이고 금수저인데, ‘나는 힘들게 들어왔다’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집권 세력인 86세대도 이제는 특권계층이 됐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자신의 윗계층만 특권계층이라고 여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나나 그들이나 금수저이고 특권계층이다. 상위 10~20%가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좌파에서 말하는 것이 설득력을 가진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양반제 폐지는 양반이 외쳐야 한다”고 말했을 때 엄청 욕을 먹었지만, 나는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자신이 양반인 걸 인정했으니까.
가수이면서 출판사와 서점, 채식음식점을 운영한다.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무엇인가.
음악이다. 글과 곡 등을 씀으로써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나타내는 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다. 칼럼이나 산문 등을 통해 옳고 그름 등 정치적인 표현을 하고, 사랑 등 감성적인 부분은 곡조를 붙인 음악을 통해서 한다. 채식음식점이나 출판사, 서점 등은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얘기하다 해보면 재미있을 듯해 함께 하고 있는데, 각각 다 대표가 있고 나는 운영한다기보다 기획하고 설득하는 등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가수, 채식주의자, 서점과 출판사 운영 등 모든 정체성을 아우르는 열쇳말이 있나.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로큰롤은 원래 해방이다. 내가 사는 곳도 해방촌이다. 내가 비건(채식주의자)이다보니 서울에서 살기 쉽지 않은데, 해방촌이 한국에서 가장 비건 친화적인 공간이다. 외국인도 많이 살고 비건 슈퍼마켓도 있고 우리 식당 ‘소식’도 해방촌에 있고, 동물권단체인 ‘동물해방물결’도 있다. 동물해방에 입각해서 채식하고, 서점 풀무질도 민족해방·민중해방·노동해방 관점에서 풀무질했고, 여기에 우리는 여성해방·동물해방 등의 담론까지 추가하려 한다.
각각의 일들에 목표치가 있을까.
평생 하는 게 목표다. 밴드도 서점도 사찰음식점도 오래 하는 거다. 평소 한국 문화가 역사적인 영속성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 문화재도 한국전쟁 때 많이 불타고, 책도 절판되거나 한자여서 한글 세대인 청년들이 읽기 쉽지 않다. 영국에서는 300년 전 책도 문법이 바뀌지 않아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어지는 맛이 있어야 사는 게 풍요롭고 재미있다. 그런 영속성의 부재가 한국인들의 자존감을 결여시키고 항상 서양만 쳐다보게 한다. 새로 만드는 것보다 이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사찰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식당을 열었고, 기존 서점을 물려받았다. 나도 죽으면서 이걸 물려주거나 넘겨줄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그런 면에서 돈이 좀 필요하다.
그런 일을 하는 데 경제적 목표의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최우선이다. 일단 잘돼야지 오래가니까. (웃음)
모두 흑자 전환이 됐나.
아직 안 됐다. 식당은 잘되고 있는데 매장이 협소해서 확장하려 한다. 출판사와 서점은 막 시작한 단계여서 안정되려면 1년은 걸린다.
인생의 장기 목표는 무엇인가.
지구적으로 원하는 건 한반도의 평화다. 개인적으로는 내 삶의 궤적 자체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 되길 원한다. 채식을 하면서 책을 읽고 쓰고, 음악을 하고,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 이런 라이프스타일이 있었구나, 그게 멋들어졌구나 하고 보였으면 한다. 조선의 양반이 조선 멸망의 원인이고 사악하고 포악한 계급이었지만, 어쨌거나 민주사회에선 모두 양반이 되려고 하지 않나. 노동해방의 핵심도 노동에서 해방이고, 마르크스도 여가와 산발적인 창조 행위만 가득한 세상이 오는 것이 공산주의사회라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삶도 산발적인 창조 행위와 자발적인 사랑으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반’을 차용했다. 양반이 놀고 먹고 멋있는 건 다 했으니까.
한국에선 물질적 성공이 행복의 중요한 요건이다. 행복의 정의가 무엇인가.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돈 문제 혹은 눈치를 보느라 못하게 됐을 때 굉장히 불행하다고 느낀다. 안정되어야 행복한 사람이 있는데, 나는 안정적인 삶에서 재미를 못 느끼니 행복하진 않았던 거 같다. 지금 삶은 보장된 게 없으니까 조금은 불안한데 하루하루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과 불안 중에서 ‘차악’인 불안을 택한 거다. 이 선택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게 목표다. 그래서 지금 그걸 보여주는 책을 쓰고 있다.
앞으로 계획은.
새 음반 활동차 12월15일 서울 홍익대 앞 생기스튜디오에서 ‘양반들’ 단독 공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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