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민이 누나가 좋아, 내가 좋아?”
“당연히 네가 좋지! 누나는 갔고 너는 왔잖아. 난 오는 게 좋거든.”
정은주씨가 아들 다엘과 나누는 대화다. 그는 중·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20년간 일하다 뇌종양으로 어린 딸 민이를 떠나보내면서 퇴직하고 죽음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현재는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상담원이자 웰다잉 강사로 활동한다. 갓난아이인 다엘을 입양해 키우며 입양가족 모임에서 우리 사회의 입양 편견을 없애기 위한 글을 쓰고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소설가 박완서는 외아들을 사고로 잃은 뒤 신에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 결과를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과 슬픔, 그 절절한 내면일기’라는 부제를 단 라는 책에서 풀어놓았다. 위대한 소설가인 고 박완서 작가도 “저 부인은 참척의 고통이 뭔지 모르리라. 그러니까 저렇게 평화롭고 거룩한 얼굴로 성호를 그으면서 기도를 할 수가 있지 나 같으면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고 썼을 만큼 자녀와의 사별은 그전에 살아왔던 세계와 앞으로 살아갈 세계를 철저히 결별시킨다. 과연 자녀와의 사별은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 우리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또 어린 자녀에게 어떻게 죽음을 가르쳐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죽음을 직면하지 않는 사회웰다잉 강사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가족의 죽음이다. 2006년 어린 딸이 죽고, 아버지가 2011년에 돌아가셨다. 딸을 보냈을 때 죽음에 대해 너무 모르고 황망한 상태였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알고자 무질서하게 이것저것 책을 많이 읽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과정에서 ‘호스피스 영성’이라는 전공 분야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죽음 공부를 시작해 웰다잉 강사 과정도 밟았다.
가족의 죽음 전에는 ‘죽음’이란 주제에 관심이 없었나.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죽는 건 겪은 적이 없었다.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을 겪으면서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전혀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구나’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삶이 완전히 새롭게 재편성됐다.
웰다잉 강의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어떤 걸 생각하고 실천하게 하려고 하나.궁극적인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거다. 사별, 펫로스(반려동물의 죽음), 자살 등의 주제는 결국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질문을 가지고 살 것인가’ 등 삶의 가치를 생각하는 철학 문제를 모두 포함한다. 그래서 웰다잉이나 죽음학은 그런 질문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죽음 준비는 일부분일 뿐이다.
한국은 서구와 달리 죽음을 이야기하는 걸 금기시한다. 서구에선 도심 한가운데 공동묘지가 있지만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한국 역사 때문일 거다. 개인적으로는 고등종교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것도 영향이 있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유교가 발달하면서 유교의 세속적이고 부정적인 부분이 극대화됐다. 참혹한 전쟁과 살육을 겪으면서 생존 자체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오로지 ‘삶’만 중요하고, ‘죽을 사’는 보기만 해도 안 되니까 엘리베이터에도 4 대신 F를 쓴다. 죽음을 성찰하거나 직면할 수 없는 사회가 된 거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죽음을 묻는다한국은 입양에 대해서도 폐쇄적이고 소극적인데, 이것도 연결돼 있을까.연결됐다고 본다. 우스개로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호부호형’을 못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죽음이라 말하지 못하고 입양을 입양이라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입양 부모들은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입양 사실을 숨길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지금은 법이 바뀌면서 완전한 비공개(비밀) 입양이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이사하면서 최대한 숨길 수 있는 시점까지 입양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 우리 사회는 죽음과 입양이 분명히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입양도 우리 사회에 아주 흔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우리 아이가 오기 전부터 나는 입양가족이었다. 내 할머니가 입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전쟁과 살육이 있었던 땅에서 고아가 넘쳐났는데, 한두 세대 건너가면 입양이 없는 집이 과연 있겠는가? 그런데도 입양을 극구 숨기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건 병적인 사회인 거다.
평소 자기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게 삶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품위 있는 삶이 가능해질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당장 내일이라도 사고가 나서 죽을 수 있다. 우리가 죽음에 집중한다면,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이 다 떨어져나간다. 죽음만을 생각하면 허무하고, 이렇게 살아도 결국 끝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삶이 충만해질 수 있다. 비본질적인 것들은 다 떨궈놓을 수 있으니까.
죽음 교육은 언제부터 하는 게 좋을까.아이가 최초로 죽음에 대해 물어올 때가 언제일까? 잘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물어본다. 길을 가다가 죽은 벌레를 보면 아이는 “이거 왜 이래요?”라고 묻는다. 또 엄마가 파리나 모기를 잡아 죽일 때도 “왜 죽여요?”라고 한다. 서구에는 아이가 죽음에 대해 묻고 관심을 가질 때부터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를 상세히 정리한 매뉴얼이 있다. 부모를 위한 책도, 아이를 위한 그림책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에게 죽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왜 아이에게 겁을 주냐?”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면서 피한다. 서구에선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에서 최선의 상황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아이가 죽음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교육하는 게 좋다고 본다.
입양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말을 시작하고 “아기는 엄마 배에서 나와?”라고 물어보는 시점부터 입양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아이가 관심을 갖는 때가 이야기를 시작할 시점이다. 다만 아이들에게 죽음을 교육할 때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 자체가 더 중요하다. 아이의 말을 충분히 들어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맥락에서 아이가 그 질문을 하는지 공들여서 들어야 한다. 답변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부모로서 나 자신이 죽음에 대해 질문하고 성찰할 용기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덧붙여 어른들도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백해야 한다
‘죽으면 끝’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종교가 없는 사람 중에는 ‘죽음=끝’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이 자녀가 ‘죽으면 다 끝인 거야?’ ‘그러면 너무 허무한데 왜 살아야 해?’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답해야 하나.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만 대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죽음 이후가 끝이라는 건 하나의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설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아이의 말에서부터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죽으면 끝이라는 건 하나의 가설이야. 그걸 네 생각으로 가져갈 수도 있지만, 수많은 문화권, 종교에서 다양한 믿음과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서구에선 과학자, 의사들 중에서는 사후세계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고 관련 자료와 논문이 엄청나게 축적돼 있다. 너나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게 허무하다면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 네 안에 질문이 생긴 거니까. 죽음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게 인류의 역사였는데, 그 많은 유산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겸손한 자세로 공부해보자’라고 말해줄 수 있다.
선생은 죽음 이후를 어떻게 생각하나.불교에선 모든 생명과 만물이 가만히 있는 게 없고 계속 변화한다고 본다. 나의 죽음은 촛불 하나가 다음 촛불로 붙여주고, 또 다음 촛불로 붙여주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나의 영향이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만물이 다 연결됐기에 그다음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이런 불교적 설명이 매력적이라서 관심 갖고 공부하고 있다.
그럼 민이가 현재 어떤 상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나.아이와 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의 육신은 죽음으로 없어졌지만 그 아이가 뭘 원했을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엄마인 내가 어떻게 살면 아이가 자랑스러웠을까를 늘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나와 아이는 분리된 존재, 별개의 존재가 아닐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이 위로가 된다.
어린 시절 갑자기 부모를 잃거나, 혹은 부모가 어린 자녀를 잃은 경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종국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내 경우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동생이 호스피스 전문가와 연결해줘서 간호학 박사가 아무런 대가 없이 일주일에 한 번씩 집으로 찾아와서 내 얘기를 들어줬다. 또 동생이 10주 상담 과정을 등록해줘 상담도 받았고, 신부님이 이끄는 사별자 프로그램을 소개받아서 참여했다. 자녀 사별자 자조모임에 나가 독서모임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글도 쓰면서 많이 치유됐고, 아이를 입양하면서 거듭나게 됐다. 내 경험이 정답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이나 인프라가 구축돼, 사별자가 고립돼 고통을 겪지 않도록 즉각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방에 다른 아이를 들이지 마라다엘과도 민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고, 다엘이 언제든 민이의 사진첩을 펼쳐보는 게 놀라웠다.슬픔을 가장 잘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직진하는 것이다. 슬픔을 바로 통과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그걸 자꾸 회피하고 다른 일에 몰두하는 건 방법이 아니다. 처음엔 우리 부모님이나 동생이 내 딸 이야기를 하는 걸 두려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조카가 우리 집에 와서 “이건 민이가 갖고 놀던 건데” “이건 민이가 만든 건데”라고 말했고, 그걸 내가 너무 좋아하니까 가족들이 그때부터 민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민이 엄마’로 불리는 것이 너무 좋았고, 아이 이름도 계속 부르고 아이 이야기를 하는 게 좋았다. 그러다보니 다엘과도 자연스럽게 민이 이야기를 했다.
어린 자녀와 사별하면 입양을 고려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마음 상태가 되었을 때 입양하는 게 좋을까.나는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입양을 생각했다. 입양을 생각하면 조이던 숨통이 약간 틔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입양하는 건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그냥 붕대로 둘둘 감아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상담받으면서 보육원 봉사 활동도 했는데, 딸을 보낸 다음해 딸의 생일이 됐을 때 딸을 묻은 대관령에 가지 않고 보육원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고 상담 선생님께 말했다. 그때 선생님이 “민이만을 위한 가슴속의 방에 다른 아이를 들이지 마라, 당신은 마음속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사람”이라는 말을 해주셨다. 민이를 위한 방이 있고, 또 다른 아이를 위한 방을 만들어야지, 이 방에 다른 아이를 들이지 말라는 말이었다. 마음속에 그 공간들이 다 정리됐을 때, 죽은 아이를 위한 마음과 새로 맞이할 아이를 위한 마음이 나란히 두 개의 방으로 존재할 때, 그렇게 열린 마음이 됐을 때, 입양할 수 있는 마음이 된다. 그건 본인이 어느 시점에 느낄 수 있다.
죽음을 당한 게 아니라 만난 것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시련과 고통, 불행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책으로 유명한 전신 화상을 겪은 이지선씨가 이렇게 말했다. “사고를 당한 게 아니라 만난 거”라고. 고통은 그야말로 만나는 거다. 그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누구나 고통을 만날 수 있다는 보편성을 아는 순간, 고통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고통을 받아들이는 마음 자세가 달라진다. 불교에선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여성이 외동자식을 잃고 석가모니에게 가서 자신의 아이를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이때 석가모니가 “네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마을에 가서 곡식을 구해와라. 단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 가서 곡식을 받아와라. 그러면 내가 너희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그 여성이 마을을 다 돌면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봤지만 그런 집은 없었다. 모두가 겪는다고 해서 당신의 슬픔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편성을 인지하면 슬픔을 통해서 나만의 슬픔이 아닌 저 사람의 슬픔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슬픔의 연대가 가능해지고, 또한 강인하면서 품위 있는 삶도 가능해진다.
그럼 지금 선생은 행복한가.행복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을 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행복에 대한 책을 많이 찾아봤는데, 어느 순간부터 행복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지금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마음에 든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니 행복한 거 아니겠나.
김아리 객원기자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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