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던 문과 지망생이었지만 아버지는 남자는 무조건 공과대학을 가야 한다며 그를 공대에 밀어넣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영업사원이 된 그는 거절당하기 일쑤인 영업노동의 고통을 영어공부를 낙으로 이겨냈다. 어학연수도 다녀온 적 없던 공대 출신 영업사원은 맨땅에 헤딩하는 자기만의 공부 비결로 동시통역대학원에 합격했다. 해외동포 출신, 조기 유학자가 넘쳐나는 대학원에서 그는 생활영어를 익히기 위해 같은 미국 시트콤에 빠져 살다 급기야 시트콤을 만드는 예능 피디가 되겠다며 문화방송(MBC)에 입사했다. 으로 명성을 얻은 뒤 드라마 피디에도 도전해 등으로 자리를 잡던 그는, 노동조합 활동과 파업에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사장’ 김재철의 전횡은 “파업하는 것보다 방송 만들어서 시청자를 재미나게 해주는 게 최고의 공익 아닌가요?”라던 자칭 ‘딴따라 피디’인 그마저 노조 부위원장을 맡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한다2012년 벌인 170일에 걸친 최장기 파업은 실패했다. 이후 그는 대기발령, 정직, 손해배상소송, 구속영장 청구 등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당시 지난한 싸움의 고통을 달래려 썼던 책 가 생각지도 않게 대박이 났다.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그는 인터뷰 때마다 “드라마 피디가 왜 드라마는 안 만들고 영어공부 책을 쓰고 있는지를 궁금해했으면 한다. 기자·피디로 살겠다고 MBC에 들어온 사람들이 파업이 끝난 지 5년인데 아직도 현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MBC에 100명 넘게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무력감에 시달리던 MBC 방송사 복도에서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홀로 “김장겸은 물러나라”를 외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에 중계된 그 동영상에 대해 김어준 총수는 “시위 영상 중 10년 이내 최고봉”이라고 격찬했다. 그렇게 다시 불을 지핀 MBC 정상화 움직임 끝에 그는 드라마 피디로 돌아갔다. 그 뒤 채시라 주연의 드라마 를 마쳤고, 새 작품을 구상 중이다. 최근 펴낸 책 (푸른숲)를 통해선 7년에 걸친 공영방송 정상화 싸움의 과정을 풀어놓으며, 품위와 웃음을 잃지 않고 적들과 싸울 수 있는 전략을 제시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온 김민식(52·사진) 피디에게 앞뒤 재지 않는 ‘겁 없는 도전’의 비결을 물었다.
80년대 학번인데 당시 학내 분위기에서는 드물게 영어 공부하고 춤추러 클럽 다니는 학생이었다. 학생운동에 무관심했던 이유는 뭔가.
내 10대 시절이 너무 엄혹했다. 고교 시절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경상도에서 교사로 일하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 때문에 괴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대에는 인생을 재미있게 살고 싶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는데, 나는 이미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런 부채의식이 없었다.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문과 지망생이었는데 아버지의 강압으로 공대 광산학과에 들어가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지’ 혼란스러웠다.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이고 민주와 민족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웃음)
2017년 혼자 MBC 복도에서 “김장겸은 물러나라”라고 외치면서 공영방송 정상화에 다시 불을 지폈다. 혼자 복도에서 외치는 방식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것을 통해 ‘MBC 정상화’라는 목표를 이룰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만 생각한다. 2012년 노조집행부로 활동하면서 최장기 파업을 주도했는데 패배했다. 잘리거나 핍박받는 조합원을 볼 때마다 모두 다 내가 잘못 싸웠기 때문인 듯해서 마음이 힘들었다. 김장겸 사장이 남은 임기를 다 채우고 나가면 나 자신의 열패감이 너무 클 거 같아서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복도에서 혼자 외치기 시작했는데, 회사에서 나를 인사위원회에 회부해 출근정지 15일의 징계를 내렸다.
나는 재심을 신청했다. 보통 사람들은 인사위에 나가는 일이 고통스러워 결과를 받아들이는데, 내가 재심을 신청하니 오히려 그들이 괴로워했다. 재심에서도 그들을 즐겁게 공격하고 그 과정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중계했다. 공영방송 정상화를 목표로 하면 그 과정에서 잘못될 수 있는 변수가 너무 많고 그러면 사람이 위축된다. 나는 그때그때 즐겁게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한발 한발 나아가는 걸음이 다 승리고 진보다. 저들이 나를 워낙 궁지에 몰아넣었기에 뭐라도 할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영어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시통역사가 되겠다는 목표는 없었다. 그냥 하루에 영어문장 열 개를 외우자는 목표로 시작했다. 그러면 내일은 오늘보다 열 문장을 더 알게 되니까. 그렇게 하다 동시통역사까지 도전하게 된 거다. 이게 인생을 사는 가장 즐거운 방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룰 수 있는 목표치만 도전한다.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상처와 좌절이 너무 크니까. 하지만 나는 20대에 좌절과 상처가 너무 많았다. 안 됐던 게 너무 많았다. 어차피 바닥이니까 여기서 안 되더라도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미보다 재미, 성취보다 도전공대 출신이 어학연수도 한 번 없이 동시통역사에 도전하고, 영업사원 출신의 동시통역사 이력으로 언론사 준비도 없이 방송사 피디에 도전하고, 예능 피디로 잘나가다가 드라마 피디에 도전했다. 또 아무도 움직이지 않을 때 혼자서 “사장 물러가라”고 외쳤다.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강한 걸까.
내 자신감은 내 인생이 바닥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바닥이라면 뭐라도 시도해야 한다. 자신감은 성취가 아니라 도전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반드시 성공의 근거가 있어야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축되기 쉽다. 내가 뭐라고 감히 이런 일을 할까라는 생각이 드니까. 나는 반대다. 시도하면서 자존감을 높인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시도하고 실패하는 편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
뭐든 결과를 개의치 않고 즐겁게 도전해 ‘긍정의 화신’으로 불린다.
사람들이 위에서 시작해서 점점 내려가면 부정적이 된다. 바닥에서 시작해서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긍정적이 된다. 나는 완전히 바닥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항상 얘기한다. 신문방송학과를 나와서 피디가 된 사람은 피디라는 직업에 대해 고마움을 모를 것이다. 나는 공대를 나와서 영업사원을 하다가 피디가 되었기 때문에 피디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매우 감사한다.
노조 활동은 그전과는 결이 다른 경험이었을 텐데, MBC 투쟁의 경험이 인생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켰나.
나는 변화가 없기를 소망한다. 이번 책을 쓴 것도 글쓰기를 통해서 내 마음의 앙금을 치유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다음 단계란, 원래 모습대로 즐거운 딴따라로 평생을 사는 거다. MBC 파업과 비제작부서(주조종실) 발령 등으로 나는 40대에 연출가로서 한창 일할 시기를 잃어버림에 따라 피디로서 실패한 인생이라는 열패감이 있다. 이는 평생 안고 살아야 하는 숙제라고 생각한다. 내 안의 상처를 돌보고 마무리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1년에 책 200권을 읽고,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쓰고, 5권 이상 책을 펴내고, 여행광이면서 맞벌이 아내와의 가사·육아 분담률도 50% 이상이다. 시간관리 비결이 궁금하다.
인간에게 가장 공평한 자원이 시간이다. 누구에게나 24시간이 주어진다. 그 24시간을 남들 하는 거 다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까지 할 순 없다. 나는 술·담배·골프를 하지 않고, 텔레비전도 거의 안 보고, 회식이나 동창회에도 안 나간다. 드라마를 찍을 때 어쩔 수 없이 회식해야 하면 1차만 한다. 50대 남자 대부분이 하는 걸 하지 않는 셈이다. 대신 잠은 하루에 7시간 이상씩 잔다. 주말이면 낮잠 자고 밤 9시에 잠자리에 드는 나를 보고 큰딸 민지가 놀리기도 한다. “아빠가 무슨 신생아냐”고. 사람들이 “술도 안 마시고 회식도 안 하고 골프도 안 하면서 무슨 낙으로 사냐”고 묻는데, 나에겐 책 읽고 글을 쓰는 게 최고의 행복이다.
인생에서 재미와 의미의 비중이 어떻게 되나.
재미가 8, 의미가 2다. 20대부터 어떤 일을 선택할 때 일관된 선택 기준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의미를 고려하는 순간, 어깨가 너무 무거워진다. ‘김장겸 물러나라’고 복도에서 외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 시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걸 할 때마다 너무 재미있고 통쾌했다. 그때도 사람들이 “네가 그렇게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걸로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때 내 대답은 이거였다. “난 의미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게 재미있어서 하는 거야”라고.
본인이 이룬 성취에서 운과 재능, 노력의 비중이 어떻게 되나.
나는 ‘운칠기삼’이란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도 운이 7, 노력이 2, 재능이 1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서우리만치 성실한데, 운이 7이었다고?
인생은 운이라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율 낮은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는 방법은 타석에 더 자주 들어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타석에 들어서려고 노력할 뿐이다. 책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책을 쓰지 않는 건 베스트셀러 작가가 목표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베스트셀러가 나올 때까지 계속 쓰는 거다. 그래서 나는 매년 한 권씩 책을 쓴다.
사람들이 나에게 성실하다고 하는데, 그 성실함은 인생이 운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왔다. 자신의 성취가 성실함에서 나왔다고 믿으면 괴물이 되기 쉽다. 그러면 남들이 노력하지 않고 이루는 것에 분노가 생긴다. 그런데 운이 좋아서 이뤘다고 생각하면 그 성과를 남들과 나누고 싶어진다. 나는 운이 좋아서 동시통역사가 되었고 운이 좋아서 MBC 피디가 되었다. 그래서 영어공부 비결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서 책을 썼고, MBC 피디가 된 운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노조 활동을 했다. 무엇보다 나는 책벌레가 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행운을 남들과 나누고 싶어서 블로그에 독서일기를 남기는 거다.
불공정한 ‘갑질 사회’ 한국에선 싸울 일이 많다. 싸움을 시작할 때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까. 그리고 싸움에서 지고도 상처받고 좌절하는 대신 성장할 수 있을까.
법륜 스님의 독자와의 만남에 참석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2012년 파업을 주도했지만 졌고, 그해 대선 결과를 보니 내가 한 일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거 같아 괴롭다”고. 당시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이 어디에서 출발하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여겨 노력한 사람은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도 좌절하지 않는다. ‘그래,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하고 마음을 돌이킨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선 죽어도 못 살겠다. 반드시 바꿔야 해’라고 마음먹은 사람은 그 시도가 실패하면 원망과 분노가 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정하고, 다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따름”이라고.
스님의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낙담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짝사랑하다가 정말 많이 차였다. 실연의 아픔이 클까봐 아예 사랑도 해보지 않은 사람보다는 절절하게 사랑하고 아파본 사람이 더 크게 성장한다고 믿는다. 싸움도 마찬가지다. 질까봐 아예 안 싸우고 도망만 다니면 훗날 자신을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삶을 살고 싶다. 남에게 보인다는 생각은 없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고, 나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싸움이란 적들에게 나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는 일이다.
고난에서 재미 찾는 게 재미다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웃음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잘 찾아보면 재미난 부분이 있고, 이걸 찾아내는 게 또 재미다. 우리가 고난 앞에서도 웃음과 재미를 찾을 수 있다면 인생에서 겁이 없어진다.
행복의 정의는 무엇인가.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또 바깥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싸울 때 많이 힘들었는데, 이렇게 힘든 시기에도 행복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게 진짜 행복인 거다. 사실 싸움의 기회가 찾아온 게 감사하다. 나 같은 철부지 딴따라가 평생 해온 독서와 공부를 실전에 적용할 기회를 만난 것이다. 역시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웃음)
독서, 여행, 글쓰기는 행복과 어떻게 연결되나.
가장 쉬운 행복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순간 바로 즐거움을 주는 힘이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93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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