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부 기자로 탄탄대로를 걸으며 40대 정치부장, 50대 편집국장을 꿈꾸다 장애아를 낳으며 인생이 180도로 바뀌었다. 딸·아들 쌍둥이를 낳는 과정에서 딸은 건강히 태어났지만, 아들은 출산 과정에서 뇌가 손상돼 지적장애 판정을 받았다. 아들은 10살인 지금도 말하는 거나 변을 가리는 것이 쉽지 않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들 치료를 위해 24시간 매달리면서 오직 세상에 존재하는 건 장애인 자식만이 전부인 이른바 ‘장애도(島)’에 갇혔다. 인간관계를 다 끊고 길에서도 땅만 보고 걸었고 집에선 뉴스를 트는 것이 금기였다. 뉴스에는 다 아는 정치인들, 기자들이 나오는데 “나는 왜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는가” 하는 우울에 자살을 만 번도 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입학한 공립학교에서 일부 학부모가 교육부에 아이의 퇴학 진정을 넣으려는 사건을 겪으며 지금까지와는 한 차원 높은 고통의 세계가 열렸다. 늘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며 모든 걸 아이를 위해 희생했지만, 사회는 단 한쪽 문도 열어주지 않는 걸 보면서 엄마는 달라졌다.
류승연(42)씨는 전직 기자에서 ‘현직 장애아동 엄마’로 커밍아웃하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등의 책은 작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고, 지금은 한 달에 8~10번씩 누가 어디에서 부르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달려가 강연한다. 그것은 “내가 행복해야지 아이와 가족을 지킬 수 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고, 잃어버린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과정이었으며, 조금씩이나마 사회로부터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시스템 바꾸겠다고 생각하니 ‘수용’ 상태로‘기자 정체성’으로만 살다가 ‘장애아동을 키우는 엄마’로 세상에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심리적 거부감이 없었나.
기자 정체성이 너무 강하다보니 3년간 죽음만 생각했다. 그런데 내겐 정면대결하는 기질이 있다. 약점은 숨겨서 들키면 약점이 되지만 내가 먼저 얘기하면 더는 약점이 되어서 나를 흔들지 않는다. 아들이나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약점이 잡히고 싶지 않아서 공개했고 그게 훨씬 편했다. 다만 아들이 장애아라고 공개하는 순간, 주변의 관계 변화는 있었다. 장애를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지만 오픈을 계기로 평생 같이 갈 사람과 아닌 사람을 거를 수 있는, 즉 ‘가짜 관계’를 정리하는 기회가 됐다.
아이가 장애 판정을 받은 13개월 때부터 8살 때까지 6년간 그 과정을 거쳤다. 첫 3년 동안 가장 힘들어서 아이가 6살 때 내가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좀 가다듬었는데, 8살 때 아이를 학교에 보내니 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학교 엄마들이 아들의 퇴학 탄원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 인생은 완전히 접어두고 오로지 아들만을 위해 살았는데, 이렇게 살아도 사회는 결코 내 아이를 받아들여주지 않음을 알았다. 내가 아들과 함께 죽지 않으려면, 내가 아니라 우리가 아니라, 저들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건 이후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걸 묶어 을 펴냈다. 글을 쓰면서 많은 장애인과 가족들을 만났고, 우리 사회의 장애인 시스템을 취재하면서 진짜 ‘수용’이 되어갔다.
한국 사회는 ‘자녀 인생=부모 인생’으로 자녀와 부모가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살기에 자녀의 장애가 훨씬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그래서 어떤 가족은 해체의 고통을 겪지만, 또 어떤 가족은 더 돈독한 공동체가 된다. 그 갈림길이 어디에 있다고 보나.비장애아동의 경우도 부모가 아이를 위해서만 모든 걸 희생하면 그 가정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나타나는 것처럼, 장애아동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람이라서, 엄마들이 자녀에게 애쓰고 고생한 만큼 기대심리, 보상심리가 작동한다. 비장애아동도 엄마가 애쓴 만큼 못 따라오는데, 장애아동은 훨씬 더 못 따라오기에 엄마의 스트레스와 울분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엄마의 임계점이 폭발하면 그 분출이 남편 또는 비장애 자녀, 장애아동에게 간다. 그러면서 엄마는 희생과 분노의 악순환에 갇히게 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이를 ‘장애인’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냥 자식으로 봐야 한다. 자녀 중에 수학 못하는 아이, 운동 못하는 아이가 있고 거기에 맞춰 수학학원, 운동학원을 보내듯이, 아이를 장애-비장애 틀이 아니라 아이마다 필요한 게 다르고 부모가 지원해야 하는 부분이 다르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랬더니 아이를 장애인으로만 보는 게 멈춰졌고, 아이의 삶과 내 삶이 분리됐고, 그런 인식 변화가 아이의 장애를 ‘수용’하는 데 가장 큰 바탕이 됐다.
화가 나고 안 나고는 나의 문제보통 사람들은 장애인을 키우는 부모는 굉장히 불행할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4~5살 때 내가 ‘장애도’에 빠졌을 때는 아이 행동이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나니까 길거리에서 아이가 문제 행동을 일으키면 확 잡아끌고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상담받으면서 아이에게 화가 나고 안 나고는 나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 과거에 화냈던 아이의 행동이 지금은 웃기고 귀엽다. 너무 ‘장애’에 매몰되고 희생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으니까 다른 게 하나도 안 보였던 거다. 시각을 바꾸면 분리가 되고 그러면 불행하지 않다.
장애아동을 키우면서 알게 된 행복이 있을까.
나는 ‘8학군’인 서울 대치동에서 ‘공부지상주의자’인 부모 아래 사교육을 많이 받고 자란 이른바 ‘스펙주의자’였다. 그런데 내 아들이 세상에서 스펙과 가장 거리가 멀지 않나. (웃음) 게다가 나는 성격이 급해서 ‘빨리빨리주의자’인데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느리다. 아이를 키우면서 행복이 스펙에 있지 않다는 걸, 스펙이 허상임을 알게 됐다. 예전에는 물질과 스펙을 쌓아가는 친구들이 부러웠는데 지금은 그들의 공허가 보인다. 아주 사소한 아이의 발전이, 내 동생들이 서울대 들어갔다고 기뻐하던 내 엄마의 기쁨과 비교도 안 되게 훨씬 더 크다. 그런 기쁨을 알게 되니 내가 더 충만하고 단단해지는 걸 느낀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난 스펙주의자로 살았을 거다.
처음 아이가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텐데, 그 불행감은 어떻게 완화할 수 있었나.
상담받으면서 그 불행을 내가 선택했다는 걸 알게 됐다. ‘불행하지만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엄마’의 위치에서 내가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걸 알았다.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불행한 엄마로 살면서 얻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남들로부터 받는 칭찬과 존경과 감탄과 위로라는 보상이었다. 그래서 불행한 엄마, 숭고한 엄마 ‘코스프레’를 놓지 않으려 했던 거다. 외부의 인정을 통해 나를 채우려다보니 나 자신이 불행을 붙잡고 있었다. 상담을 통해 상황이 불행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 것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 불행감을 놓아주게 되었다. 이제 너 가라고.
아이랑 같이 놀이공원에서 바이킹을 탔는데, 그때 아이가 평생 보여주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 행복해 보였다. 나와 7년간 24시간 붙어사는 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걸 계기로 아이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치료를 많이 정리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수영이나 물놀이를 시작했다. 또 장애인을 많이 만나면서, 장애인 자립의 관건은 기능이 아니라 관계 맺기라는 걸 알았다. 그건 비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명문대 나오고 대기업 취직해도 관계 맺기에 실패하면 술에 빠지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되지 않나. 그래서 아이의 행복한 관계 맺기에 방점을 두었다.
그렇게 방향을 튼 게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나.
확실히 그렇다. 아이가 원래 지금 다니는 장애인학교에서 문제 행동이 가장 심한 학생이었다. ‘싫다’는 표현을 할퀴고 때리고 물어뜯고 발버둥치는 것으로 했으니까. 나나 모든 선생님이 단호하게 야단치는 방식으로 그걸 고치려 했다. 그런데 비장애인 아이가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말과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야단치면 아이가 바뀔까? 아이의 말을 들어주고 마음을 풀어줘야 아이가 변하지 않나. 그래서 내 아이도 교육적 접근, 기능적 접근 대신 관계 맺기부터 다시 시작했다. 학교 선생님과 웃고 껴안고 놀면서 신뢰관계를 쌓았더니 10년간 못 고쳤던 문제 행동들이 3개월 만에 고쳐졌다. 정말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장애 교육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능 향상보다는 관계 맺기를 중심으로 말이다.
장애아동 부모는 자녀만을 위해 희생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한데, 과감히 본인의 행복을 찾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자신에 대한 기대와 스펙주의가 심했던 인간이다보니 ‘장애도’에도 유난히 심하게 빠졌다. 다른 부모들보다 상실과 좌절이 컸다. 천 일이 넘는 동안 하루에 삼십 번씩 아이를 데리고 죽을까, 혼자 죽을까 이것만 고민했다. 3년간 단 하루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게다가 자식도 함께 죽을 생각까지 한 엄마가 제정신이겠나?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잘 키울 수 있겠나? 이대로 살다간 실행에 옮길 거 같았다. 죽기 싫어서, 죽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행복해야 가족을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의 장애와 거리를 두면서 행복을 찾는 과정은 다름 아닌 일상성을 회복하는 과정으로 보였다.
아이의 장애를 얼마나 수용했는지 확인하는 바로미터가 바로 ‘일상성 회복’이다. 물론 지금도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난리 칠 때가 있지만, 현재 일상성이 80% 정도 회복됐다고 본다. 나도 내 삶을 살고, 우리 딸도 그전에는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지키는 아이였는데 이제 동생과 자신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남편도 남편대로 잘 살고 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졌나.
‘장애도’에 빠졌을 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일단 울었다. (웃음) 침묵한 채 가족들 밥을 먹이고 학교나 직장에 보내고 집안일을 조금 한 뒤 곧바로 아이를 데리러 가서 치료실을 전전하다 집에 와서 또 한 번 울었다. 그리고 저녁밥 먹이고 아이에게 이것저것 기능 향상 훈련을 시키다가 울고, 남편과 딸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아들만 쳐다보며 살았다. 울면서 잠들었다가 새벽에 울면서 깨어 아들 기저귀를 갈아줬다. 지금은 보통 사람들처럼 일어나서 소리부터 지른다. “또 늦었다! 빨리 일어나!” 아침 먹이고 학교나 직장에 내보내고, 나는 카페에 가서 글을 쓰거나 강연을 가거나 사람들과 만나서 놀기도 하고 모임에 가서 공부도 한다. 오후 5시가 되면 두 아이와 만나는 시간이다. 아들은 활동보조 선생님과 치료실이나 수영장, 놀이터 등에서 놀다가 오고 딸은 학원 마치고 오는 시간이다. 저녁을 먹고 다 같이 동네 산책을 나간다.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에 간식을 하나씩 입에 물고 온다. 집에 오면 “빨리 잘 준비해!” 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하고 아이의 장애에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다른 가정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예전에 다른 삶을 살았던 이유는 우리 집에 장애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 집안에 장애인이 있는 게 아니라, 말 안 듣는 자식 두 명이 있을 뿐이다. (웃음)
평범한 일상이라는 행복을 찾았지만, 그래도 미래에 장애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날 때를 생각하면 막막한 두려움을 떨치기 어려울 거 같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아이를 놓고 가도 큰 문제가 없도록 하는 그 작업을 꼭 하고 갈 거다. 아이의 자립을 위한 준비와 사회가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이지만 글쓰기를 통해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해서 한명 두명 바뀌고, 100명 200명 바뀌고, 몇천 명 몇만 명 바뀌고, 이렇게 20~30년 하면 걱정 없이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막 자녀의 장애 판정을 받은 부모에게 한마디 한다면.
“괜찮아, 인생 끝난 거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다.
행복과 불행, 그리고 고통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고통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당연히 존재하고 나와 더불어 가는 것이다. 불행은 고통과 한 몸이 되어 절벽을 향해 뛰어내리는 것이다. 행복은 고통과 나란히 옆에 서서 손잡고 더불어 걸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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