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때 소년은 친형 손에 이끌려 처음 영화관에 갔다. 영화관에 불이 꺼지고 스크린에 빛이 들어오자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빨려 들어가듯이 영화를 봤다. 그 경험은 마술과 같았다. 소년은 이 마술과도 같은 일을 누가 하는지 궁금했고, 자신도 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14살 때 소년은 자신이 여자가 아닌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임을 알게 됐다. 남자 친구들이 여학생에게 흥분할 때 소년은 남자 친구에게 가슴이 뛰는 사람이라는 게 당황스러웠다. 18살 때 영화인의 꿈을 갖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지만 영화는 내팽개치고 학생운동에 빠졌다. 몸담은 운동권에서 ‘동성애는 미제국주의의 썩은 문화가 잘못 유입된 산물’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운동권을 떠나기는커녕 자신의 성정체성을 억압하며 반성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29살 때 스웨덴 같은 선진국에선 동성애가 병이 아니고 스스로를 ‘게이’라고 하며 차별 없이 산다는 걸 알게 되면서 처음 동성애에 대한 책과 논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뒤늦게 운동과 동성애가 함께 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했지만 바로 긍정하진 못했다. 1993년 ‘한총련 건설’을 마지막으로 학생운동을 접고, 문화운동의 꿈을 안고 영화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옥탑방에 살면서 보습학원 강사 등으로 생계를 꾸리며 단편영화 제작부터 시작했다. 그가 대표를 맡은 ‘청년필름’은 상업영화까지 진출해 시리즈 등을 제작하며 영화계에서 자리를 잡았고, 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41살 때 영화 (2006) 제작발표회 자리에서 “나는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다. 48살 때 서울 청계천에서 오랜 파트너인 김승환씨와 공개 결혼식을 올리고,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서도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혐오발언의 폭탄을 맞고 오물 세례까지 받았지만 좌절하기는커녕 오히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엔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특별위원장을 맡아 내년엔 총선에 출마할지도 모른다.
10월9일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성소수자 문화창작 박람회’에서 바쁘게 뛰는 김조광수(54) 영화감독 겸 성소수자인권운동가를 만났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오래도록 부정하고 거부하다, 인정하고 긍정하고 나아가 대중에게 커밍아웃하고 성소수자운동의 선봉에 서기까지 과정이 행복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묻고 싶어서였다. 또 학생운동을 거쳐 문화운동, 동성애인권운동까지 36년간 쉼 없이 운동가로 달릴 수 있는 비결도 궁금했다.
그 사람들 때문에 운동을 하는 게 아니다1980년대 학생운동 하던 시절, 운동권 내에도 동성애를 ‘미제의 썩은 문화가 잘못 유입된 산물’로 보고 혐오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어떻게 그 안에서 10년 이상 운동을 할 수 있었나.
그래서 학생운동 하던 시절 나의 성적 지향을 고백할 수 없었다. 1990년대 초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활동가들과 함께 영화 를 봤는데, 그때 활동가들이 영화를 다 본 뒤 “아 더러워, 노조위원장이 호모라는 게 말이 되냐”고 비난했을 때 상처를 받은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1985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은 기독교 신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교회와 목사, 기독교 신도가 동성애를 혐오한다. 하지만 내가 기독교 신자인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지 교회나 목사를 믿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동성애를 혐오한다고 해서 내가 예수를 떠날 이유는 없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정치적 지향이 진보이고 좌파이기에 운동을 하는 것이지, 그 사람들 때문에 운동을 하는 게 아니니까 운동을 떠날 이유가 되지 않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보수기독교단체와의 면담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등 보수 진영이 아닌 진보 진영에서 이런 발언과 입장을 들으면 좌절감이 클 거 같다.
공개 동성결혼식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나는 앞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동성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겠다. 그것이 나의 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청문회든 공직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혐오세력이 먼저 묻는다. (웃음) 전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됐던 동성혼을 우리 사회가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특히 공직에 나가는 사람들은 통과의례처럼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서 밝혀야 하는 사회가 된 것을 일단 긍정적으로 본다. 다만 공인이 되기 전에 가졌던 입장과 공인으로서 입장이 다르다는 건, 혐오세력에 위축돼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많이 아쉽긴 하다.
사회에 커밍아웃을 하고 공개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그걸 하지 않았다면 듣지 않아도 될 혐오발언과 오물 세례까지 받아가며 굳이 가시밭길을 걷는 이유는 무엇인가.
14살 때 같은 반 친구를 좋아하면서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알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불행했던 일을 묻는다면,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았던 그 순간을 꼽고 싶다. 그로부터 내가 동성애자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15년 이상 걸렸다. 남자를 좋아하는 걸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쳐 지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도 사귀려 노력했고 많이 괴로웠다. 서른이 되어서 동성애자임을 인정했지만, 인정했다고 해서 바로 긍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 동성애자, 그래서 나 행복해’가 아니라 ‘나 동성애자야, 이제 어떻게 살아!’가 된 거다.
동성애자임을 긍정하기까지 또 몇 년 걸렸다. 내가 만약 14살 때 동성애자인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긍정했다면 지난 15~20년의 내 인생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후배들은 나보다 더 짧게 괴로워하고 더 빨리 긍정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내가 동성애자인 걸 인정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정보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드물게나마 동성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황색신문(주로 선정적 기사를 다루는 신문)이었는데, 황색신문은 ‘동성애자들은 아무나하고 화장실 같은 데서 성관계를 하며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주니 내가 동성애자라는 게 너무 싫었던 거다. 누군가 커밍아웃해서 열심히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자신의 동성애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좀 수월하겠다 싶었다. 공개적인 삶 때문에 겪는 비난과 혐오로 힘들 때도 있지만, 나로 인해 한두 명이라도 행복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커밍아웃, 어렵고도 쉬운 길책 를 썼다. 동성애 차별이 심한 사회에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나는 동성애자임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긍정하게 됐다. 내가 동성애자임을 긍정하지 않았으면 행복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지금 ‘50대 이성애자 남자’로 살고 있었다면 얼마나 꼰대 같고 고루했겠나? 나도 그런 사람이 될 뻔했는데, 그나마 그런 사람이 안 된 것은 내가 게이이기 때문이다. 성다수자가 아니라 성소수자로 살면서 받은 차별이 있기에 다른 차별을 겪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러니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게이라서 불편한 점도 힘든 점도 분명 있지만, 게이라서 행복한 점이 더 많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장애인·이주노동자 등 소수자들과 달리, 동성애자는 본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차별받지 않고 살 수 있다. 차별과 혐오를 감수하고서라도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그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자기긍정에 굉장히 중요하다. 아무에게도 자기 정체성에 대해 말을 못하고 산다면 스스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든 자기 정체성을 조금씩 열고, 그런 공간이 점점 더 열리면 결과적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에, 잘 준비된 커밍아웃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만 자기긍정을 하기 전에 커밍아웃을 하긴 어렵다. 내가 나 자신을 긍정하지 않는데 상대에게 나를 긍정해달라고 할 순 없지 않나. 또 동성애 혐오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커밍아웃이기도 하다. 가까운 친구 중에 동성애자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정말 큰 차이가 있다. 친한 친구 중에 동성애자, 성소수자가 있으면 혐오발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성소수자임을 밝힐 용기가 있고, 주변에 그걸 받아줄 만한 사람이 있다면 커밍아웃을 하라고 권유한다.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본인도 자기긍정을 획득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도 변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커밍아웃이 가장 어렵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우리 사회를 바꾸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운동이란 게 기존 질서와 싸우는 일이고, 싸우는 일이라는 게 즐거움과 기쁨보다는 분노와 원망, 슬픔의 감정을 더 많이 자극하는 활동이다. 평생 싸우는 일을 하면서도 늘 웃는 얼굴이다.
나는 변화하는 것에 조금 더 관심이 많고 거기서 즐거움을 많이 찾는 편이다. 운동을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 더디 변하는 것들이 태반이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씩 변하는 것들이 있지 않나. 지금 대한민국이 실망스럽더라도 군사독재는 아니지 않나. 박근혜가 탄핵 정국에서 친위 쿠데타를 해보려다 안 되지 않았나. 그것을 보면서 대한민국에서 이제 군사 쿠데타는 없어졌다는 게 확인됐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그런 것에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 면에서 남들보다 확실히 좀더 긍정적인 면이 있는 거 같다.
사소한 변화에도 즐거움과 큰 의미를 느끼니까 싸움의 길에서도 행복하다는 건가.
그렇다. 싸우면서 행복하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많이 느낀다. 비록 혐오세력이지만 청문회에서 공직자에게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묻는 그런 변화도, 나에겐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이기 때문에 굉장히 기쁘다. 그래서 운동을 장기적으로 할 수 있는 거 같다.
그런 긍정성은 타고난 것인가.
내가 한양대를 다니던 시절 ‘애국한양 자학파’라는 분파를 만들었다. 내가 하도 자학이 심해서 자학이 심한 후배들을 불러 모아 만든 파다. (웃음) 그때 매일 잠자기 전 1시간씩 하루를 되돌아보며 잘못한 점을 나열하고 다시는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잘못을 많이 한 날엔 주기도문을 100번 외우는 등의 처벌을 스스로에게 내렸다. 당시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을 긍정하지 못했고, 신이 허락하지 않은 동성애를 품고 있다는 죄책감에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으로 벌을 주려 했던 거다. 매일 자신을 다그치고 벌 주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즐거움을 주었겠는가. 내가 동성애자임을 긍정하고 커밍아웃하면서 자학하고 스스로를 처벌하는 게 없어졌다. 주변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김조광수 감독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하지만 낭만성을 잃지 않는 ‘낭만적인 투사’라는 평가가 있다. ‘낭만’과 ‘투쟁’을 양립시키는 비결은 무엇인가.
먼저 영화라는 ‘판타지’를 직업으로 삼기 때문에 갖는 낭만성이 있는 거 같다. 또 성소수자운동이 한편으로는 혐오를 받는 운동이라서 괴로운 운동이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한 운동이다. 내가 행복하게 잘 살면 이게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동성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사는 걸 보여주는 것도 투쟁의 한 방식인 거다. 내가 괴롭게 사는 건 혐오세력이 바라는 바다. 내가 원하는 세상은 동성애자들이 행복한 곳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투쟁의 한 방법이니까, 낭만적인 투쟁이 가능한 거다.
영화 작업이나 운동을 할 때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즐거움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목표 달성이나 보상에 연연하지 않는 거 같다.
영화를 만들 때 돈이나 명예, 성공이 목표였던 적이 없다. 영화를 만들고 관객과 소통하는 게 재미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를 오랫동안 계속 만들고 싶다는 것만 있을 뿐이다. 운동 역시 그냥 ‘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목표만 있을 뿐이지, 운동을 통해 내가 뭔가 되거나 얻거나 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에 실패하거나 보상이 없어도 크게 좌절하지 않는다.
물질적 보상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오래 매진할 수 있는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나.
작은 행복이다. 내 행위로 인해 작은 변화가 있고, 그 변화가 나에게 행복을 주니까.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게 오래 하는 비결이다.
정의당 차별금지법추진특위 위원장으로서 어떤 활동 계획이 있나.
정의당이 1980년대 운동권 이미지가 강하고 지지층이나 당원들의 연령대가 생각보다 높다. 그래서 기존 정의당 유튜브와 달리 재미있는 예능 형식으로 정의당을 알리는 유튜브를 운영해볼 계획이다. 권영국 변호사, 장혜영 감독 등 이번에 새로 영입한 분들, 심상정 대표와 함께 전국 순회 콘서트도 할 계획이다.
총선 출마 계획은.
유튜브와 전국 순회 콘서트를 해보면서 내가 잘할 것 같고 또 재미있을 것 같으면 출마하겠지만, 재미는 있는데 잘 못하겠거나, 잘할 수는 있는데 재미없을 것 같으면 출마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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