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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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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학생

등록 2019-10-24 10:16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여름 더위가 한창일 무렵 중앙아시아 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인상 깊은 장면이 여럿 있었는데,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 호수를 찾았을 때 마주친 장면도 그중 하나다. 이식쿨 호수는 제주도 넓이의 서너 배쯤 되는 크기를 지녔고, 화창한 날에는 건너편에 톈산산맥의 설산이 길게 늘어선 모습도 볼 수 있다. 이토록 좋은 곳까지 왔는데 눈으로만 보고 돌아서는 건 아쉬워 일행과 함께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아동노동과 학습노동

숙소에서 차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선착장이 나왔다. 예약해놓은 유람선을 타기 위해 잠시 기다리는 동안 독수리인지 매인지 모를 야생 조류를 팔뚝에 올려놓은 소년 몇 명이 보였다. 신기한 듯 바라보는데 그중 한 소년이 일행에게 다가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자기 팔뚝 위에 올라앉아 있던 새를 일행의 어깨 위로 올려주었다. 자신의 새를 빌려줄 테니 사진 찍고 돈을 내라는 뜻임을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따라온 소년도 자신의 새를 반대편 어깨에 올려놓았다.

그 장면을 보면서 오래전 몽골 여행을 하던 중에 마주친, 양동이 안에 산딸기를 담아놓고 팔던 소녀가 겹쳐진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거기다 미얀마의 카렌족 소녀가 관광객을 위해 춤추던 모습까지 떠올랐다. 그 소녀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래도록 잔상에 남았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다보면 비슷한 풍경과 어렵지 않게 마주치곤 한다. 그때마다 저 아이들이 학교는 다니고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전세계에서 아동노동 인구가 1억6천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앞서 예를 든 아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종일 돌을 깨거나 나르고, 심지어 광산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도 많다고 들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제32조는 “모든 아동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해서는 안 되며, 건강과 발달을 위협하고 교육에 지장을 주는 유해한 노동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어딘가에선 수많은 아이가 돈 몇 푼 벌기 위해 연장을 들거나 호객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빈곤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그들 나라의 현실을 생각하면 도덕주의를 앞세워 그 아이들의 부모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 내가 살고 있는 땅의 아이들 현실은 어떨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 땅에도 적은 수이지만 아동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다수는 노동 대신 학습에 매달리는 게 사실이다. 문제는 그 아이들이 하는 학습이 그저 학습일 뿐일까 하는 점이다. ‘학습노동’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건 미래 노동자를 길러내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노동’이라는 말로 아이들의 학습노동을 설명하기도 한다. 경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금을 받는 노동 외에 뒤에서 경제체제를 떠받치는 가사노동과 학습노동 같은 게 있는데 그걸 그림자노동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실제 학생들이 학교나 학원에 가서 학습노동을 하지 않으면 교육시장은 무너진다.

주말노동까지 감당하는 아이들

이 땅의 아이들이 감당하는 학습노동은 하루 8시간을 훌쩍 초과하며 주말노동까지 하는 게 현실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아동노동 대신 과도한 학습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정말 행복한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박일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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