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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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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과 싸우느니 자신과 싸우자

욕망을 자식한테 투사하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다
등록 2019-07-18 10:52 수정 2020-05-03 04:29
대학수학능력시험을 100여 일 앞둔 날, 학부모가 절에서 자녀의 학업 성취를 빌고 있다. 한겨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100여 일 앞둔 날, 학부모가 절에서 자녀의 학업 성취를 빌고 있다. 한겨레

10년 전이다. 뚱땡이로 마흔 살을 맞기 싫어 근력운동을 겸한 체중 감량을 했다. 지금처럼 유투브 속 ‘무서운 언니들’이 없을 때라 몇 가지 아는 동작을 반복하는 정도였지만 제법 효과는 있었다. 부들거리며 플랭크를 하는 나를 보고 네 살 된 아이가 놀라 물었다. “엄마, 뭐해?”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답했다.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중이야.” 아이가 울먹이며 만류했다. “자기랑 왜 싸워. 사이좋게 지내야지.”

이랬던 아이가… 세월이 흘러 뚱땡이로 쉰 살을 맞기 싫어 다시 부들거리는 나에게 “엉덩이 더 들고, 시선 전방”을 시크하게 외치며 “술을 끊어야지, 운동만으로 되겠나”를 덧붙이는 다크한 중딩이 되어 있다. 그래, 40대 내내 부침을 거듭하던 내 몸무게는 다시 원점이다. 돌고 도는 인생. 하지만 여론조사와 몸무게는 ‘추이’를 봐야 한다. 오를 때는 모른 척하지만 내릴 때는 민감할밖에. 대통령 지지도와 같은 맥락이랄까.

100세 시대, 이대로 남은 반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다. 이쯤 되면 자기 관리에서만큼은 ‘보이는 게 전부’다. 나랑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라도, 사이좋아 보이기 위해서라도, ‘관계 정돈’은 필요하다. 가슴에 있어야 할 애들이 거들먹거리며 배에 모여 있다거나, 팔이 잡히려다 옆구리 살이 대신 잡혀 끌리는 부적절한 끼리끼리 패거리 문화는 바꿔야 한다.

하지만 폭풍 감량은 불가능하다. ‘수발 노동자’인 나는 아직 거두어야 할 어린 자식과 날이 갈수록 어려지는 늙은 부모가 있다. 뜻대로도 잘 안 되지만 맘대로도 할 수 없는 시기다. 핑계 아니다. 기력이 딸려도 난처하지만 무엇보다 폭삭 늙고 머리카락 빠진단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이가 이런 식으로 심하게 비주얼이 바뀌어 있다면 지나친 감량 탓인지, 투병 중인지, 수발 때문인지 조심스럽기도 하다.

비록 몸무게는 제자리이나 허송세월만 한 건 아니(라고 믿는)다. 사람 보는 눈이 꽤 생겼다. 한동네 오래 산 덕분이려나. 몇 년 사이 ‘인상이 바뀐’ 이들을 종종 본다. 부드러워지고 넉넉해진 이들도 있지만 유독 ‘성이 나’ 보이는 얼굴이 있다. 이 불편한 안색과 흥분한 기색은 뭘까.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십중팔구 ‘자식과 씨름하는 중’병에 걸린 것이다.

아이가 학교 수업에 필요한 모둠 작업을 하는데, 한 아이가 꽤 늦은 시간까지 맡은 몫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휴대폰 사용 더는 못하고 학원 숙제해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연락두절이 된 모양이다. 아이들이 급한 김에 통화하며 동동거리는 것을 안 듣는 척하면서 들었다. 슬쩍 지나가는 말투로 “그렇게 급하면 ○○이 엄마께라도 연락드려보면 어떠니” 하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잘못하다가 걔 엄마한테 더 죽어.” 평소 얼마나 애를 죄었으면 모둠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말도 제 엄마에게 못할까. 친구들의 원망보다 엄마의 호통이 더 무서운 것이다.

안 그래도 얼마 전 그 엄마를 오랜만에 만나고 적잖이 당황했다. 처음에는 눈썹을 잘못 그린 줄 알았다.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만나자마자 폭풍 푸념을 들었다. 지 언니는 안 그랬는데 ○○이는 왜 그 모양인지로 시작되는, 생활 태도가 엉망이라 수행평가 결과가 나쁘다는 요지였다. 할 일 제때 안 하고 뭉개다 매번 시험을 망친다는 것인데, 태도가 성적의 종속변수인 것같이 들렸다. 우연히라도 좋은 성적 나왔으면 애가 농땡이 좀 부린들 퇴근길 바쁜 시간에 이렇게 길에서 하소연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맑고 밝던 아로미는 어디 가고 우둘투둘 심퉁맞은 투투가 내 앞에 있나. 급기야 “내가 지한테 시간을 얼마나 많이 주는데…”라는 소리까지 한다. 아, 그냥 못생겨진 게 아니었어. 자식 시간이 엄마 시간인가. 욕망을 자식한테 투사하는 것만큼 바보짓은 없다. 결코 이기는 싸움이 아니다.

자식과 싸우느니 자신과 싸우자. 너의 성적보다 나의 미모가 더 중요하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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