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머니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식당을 해왔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며 삶의 마무리를 준비해가는 71살, 당신은 당신의 71살을 상상해본 적 있나요?”
유튜브에 ‘아리가또만 말하는 일본여행 in 돗토리현’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영상은 주인공 박막례씨의 손녀 김유라씨가 쓴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71살이 되기까지, 박막례씨의 삶은 최선을 다한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1947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음에도 “아버지가 가시내들은 갈치면(가르치면) 안 된다고, 취학통지서를 감춰서 학교를 안 보냈다.” 스무 살에 결혼해 삼 남매를 낳았지만, 남편은 일찌감치 집을 나갔다. 과일 장사, 떡 장사, 가사도우미에 이어 40년 넘게 식당 일을 하며 혼자 자식들을 키우고 남편의 빚까지 대신 갚았다. “다시 내 인생 돌아보기 싫어. 내 인생이 젤로 무섭지”라고 회상할 만큼 신산했던 날들을 견디고 70살이 되었을 때, 의사는 그에게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유튜브 CEO에 이어 구글 CEO 만나다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그다음이다. 2017년 1월, 김유라씨는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할머니와 오스트레일리아 여행을 떠났다. 스노클링에 도전했다 물을 잔뜩 먹고도 신나게 헬멧 다이빙을 즐기고, 낯선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김유라씨가 유튜브에 올리자 금세 화제가 됐다.
2019년 5월 현재 유튜브 ‘박막례 할머니 Korea Grandma’ 채널의 구독자는 86만 명을 넘었고, 인스타그램 팔로어는 26만 명을 훌쩍 넘는다. 동네 아저씨에게 한글을 조금 배운 것이 전부였던 박막례씨가 생애 처음으로 받은 상은 유튜브 실버 버튼(구독자 10만 명 이상을 보유한 유튜버에게 주는 상징물), 처음 받은 상장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표창장이다. 그는 2018년 구글의 개발자 콘퍼런스 I/O(Innovation in the Open)에 한국을 대표하는 인플루언서로 초대받았고, 올해 4월에는 유튜브 CEO(최고경영자) 수전 보이치키가 그를 만나러 한국에 왔다. 그리고 지난 5월7일, 구글의 CEO 순다르 피차이 역시 ‘2019 구글 I/O’에 초대받은 박막례씨를 따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왜 그들은 박막례씨를 특별히 환대할까. 86만 명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지만, 박막례씨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거나 인기 있는 콘텐츠 크리에이터는 아니다. 음악, 먹방, 댄스, 뷰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젊은 크리에이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의 채널은 그동안 미디어에서, 특히 ‘모성’이라는 키워드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룬 바 없는 한국 노년 여성의 삶에 주목하고 박막례라는 독특한 개인의 캐릭터를 통해 대체 불가한 콘텐츠를 전달해왔다.
박막례씨와 만난 수전 보이치키는 “유튜브에 대한 저의 꿈은 전세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고, 할머니의 이야기는 유튜브가 없었더라면 전해질 수 없는 이야기의 예시”라며 “유튜브를 통해 꿈을 실현하고 전세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콘텐츠를 만들고 계시다”라고 강조했다. 즉, 박막례씨는 유튜브라는 글로벌 플랫폼이 지향하는 가치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다.
과일과 최수종, 여행을 좋아하는 박막례씨의 요즘 유일한 걱정거리는 아픈 무릎이다. “우리는 (친구랑) 연락이 안 되면 죽었다고 생각해” “계주의 장점은 첫째, 치매가 안 걸리겠더라” 등 죽음과 치매를 이웃처럼 여기는 칠십 대는 먼저 세상 떠난 가족의 유골을 뿌린 경험조차 블랙코미디 농담으로 소화한다. 하지만 그는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심드렁하게 굴거나 과거에 멈추어 살지 않는다. 대신 “이 나이에는 기대감으로 사는 거”라며 계 모임의 소중함을 설파하고 사막에서 엉덩이로 보드를 밀며 깔깔 웃고, 친구들과 ‘꽃할배’ 같은 독일 여행을 떠날 날을 꿈꾼다.
“유튜브를 하며 처음으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걸 하면서 느낀 점은 할머니가 나, 아니 우리랑 똑같다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도 좋아한다는 뜻이다.”(웹 사이트 ) 김유라씨의 이 말은 노인의 욕망이 근본적으로 젊은이와 다르지 않음을 시사한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god )류의 가사를 비롯해 나이 든 여성이 가족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고 희생하는 서사는 무수히 생산되고 권장되어왔다. 그러나 박막례씨는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액세서리, 멋진 여행을 좋아하는 자신을 당당히 드러낸다.
김유라씨는 할머니와 친구들에게 ‘마피아 게임’을 제안하거나 공연에 모셔가는 등 그들이 몰랐던 즐거움을 만끽할 기회를 제공한다. 그는 할머니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건네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게 하고, 패스트푸드 가게의 무인주문기가 할머니를 비롯한 노인들에게 얼마나 불친절한 시스템인지 세상에 알린다. 김유라씨가 제작한 영상에는 ‘효’라는 개념보다 더 넓은 의미의 애정과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단지 아랫사람이기에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즐겁게 지내온 관계이기에 그런 영상 제작이 가능했을 것 이다.
계속 새로운 날을 살아가는 존재서두에 언급한 영상의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아마… (71살의 자신을) 상상하기 싫으시죠? 하지만 우리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침개처럼 확 뒤집어질 수도 있거든요.” 기대수명이 80살을 넘어서고 노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나는 시대에 나이 드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온통 두렵기만 한 일은 아닐 수도 있다. 부침개 뒤집기 같은 인생 역전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박막례씨와 김유라씨가 그동안 보여준 것은, 노인이 지나간 존재, 뒤처진 존재가 아니라 계속 새로운 날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는 만큼 두려움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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