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미국 폭스뉴스 회장을 성희롱으로 고소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에는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이 고소가 있기 10년 전, 폭스뉴스 앵커이자 워싱턴 지국장 브라이언 윌슨은 리포터 루디 바크티아에게 전일제 업무를 제안하며 말한다. “내가 자넬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그러자 루디의 속마음과 그가 고심하며 내놓는 말이 교차하며 이어진다.
성접대 요구를 거절하자 날아온 것
루디: (아, 씨발, 씨발, 씨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저도 브라이언을 존경하거든요.
브라이언: 아니, 아니 내 말은… 내 감정 말이야.
루디: (못 알아듣는 척한다.)
브라이언: 내가 원하는 건 자네 호텔 방을 보는 거야.
루디: (이런 젠장.)
브라이언: 그거 하나면 돼.
루디: (반응하지 마. 내 탓인 척해.) 제가 오해 살 만한 행동을 했다면 사과할게요.
성접대 요구에 루디가 조심스레 거절 의사를 밝히자 브라이언은 불쾌해한다. “나만 변태 된 거 같군.” 루디는 애써 웃으며 말한다. “그럴 리가요.(변태 새끼!)” 그에겐 “변태 새끼!”라고 외칠 자유가 없다. 상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신을 보호하며 계속 일하고 싶기 때문이다. 루디는 완곡하게 선 긋기, 회피, 무응대, 자책, 사과, 억지웃음 등 온갖 우회적인 방법으로 덫을 벗어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해고다.
친구가 신입사원 시절, 임원의 성희롱으로 고민하다 상사에게 보고했을 때 돌아온 답은 “상무님, 외로우신 분이야”였다. 상무가 회식에서 블루스를 요구하건 어깨를 주물럭거리건 입 다물라는 뜻이었다. 친구는 이직했다. 그러나 같은 피해를 입었던 동료는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다. 여성에겐 취업문이 훨씬 좁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노동자로 사회에 뿌리내리려 노력하는 수많은 여성이 일터에서 그냥 ‘여자’로 취급당하며 겪는 일을, 그 뒤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 척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걸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서울시장만 빼면 ‘흔한’ 직장 내 성폭력
그런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묻는다. “왜 바로 그만두지 못했느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피해자 김지은씨는 초기 피해 이후 주위에 도움을 청했다가 외면당한 뒤의 상황을 진술한다. “사건을 머릿속에서 지우기 위해 시간을 도려내고 또 도려냈다. 사건과 일을 철저히 분리했고, 가해자 안희정과 직장 상사 지사님을 철저히 분리했다. 그렇게 가해자에게서 도망치지도 소리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들려 살았다. 이것이 ‘해리 증상’이라는 것도 이후에야 알게 되었다.”(책 <김지은입니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미투 운동을 둘러싼 ‘조롱’에 관해 분석한다. “미투를 문제 삼는 이들의 또 다른 단골 소재는 폭로의 시점이다. ‘이제 와서’라며 질책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내가 이들에게 가장 놀란 건 어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사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책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얘기해보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7월12일,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가 쓴 기사 제목은 이렇다.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64세 박모씨가 숨졌다’. 피고소인이 서울시장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배제한 채 기술”한 이 기사의 앞부분만 읽는다면 이 사건이 한국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직장 내 성폭력 양상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무원이자 비서로 일해온 피해자는 4년 동안 상사의 성추행을 겪은 끝에 7월8일 고소했다. 안희정에 이어 오거돈 전 부산시장마저 여성 직원을 성추행한 사실이 밝혀져 사퇴한 사건들과 이 사건의 차이는, 피고소인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바람에 ‘공소권 없음’으로 형사고소가 진행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인구 천만에 육박하는 대도시 서울의 3선 시장이자 대선 주자로도 꼽혔던 인물의 장례가 서울시장장(葬)으로 치러지고, 그의 수많은 공적을 돌이켜 아쉬워하는 기사와 정·관계 유력 인사들의 애도 사이에서 피해자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워졌다. 망자를 추모한다는 핑계로 피해자를 불신하고 신상을 캐려 하며 악의 어린 말을 뱉어내는 움직임은 집요하다.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호소하는 피해자의 삶은, 과연 한국 사회에서 피고소인의 삶과 같은 무게로 인정되고 있을까?
<밤쉘>의 후반, 피해자 중 하나인 케일라(마고 로비)는 말한다. “직장 내 성희롱은 이런 것입니다. 당신을 질문의 늪에 몰아넣어요. 그럼 끊임없이 자문하죠. 내가 뭘 했지?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내가 뭘 입었지?” 다른 여성들이 이어받는다. “내가 돈을 노렸다고 소문이 날까?” “내가 ‘관종’이라고 하진 않을까?” “평생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까?” 너무나 낯익은 질문들이다. 다시 케일라가 묻는다. “여기 남는다면 참고 견뎌야 할까? 다음 직장은 다를까? 아니면… 내가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러나 다르게 만드는 것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람이 입을 여는 건 시작일 수 있지만, ‘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해야 한다.
“어떤 자살은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
박 전 시장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3월 출간된 <김지은입니다>는 이삼십 대 여성들의 ‘구매 연대’로 일시 품절 상태에 이르렀다. 또, 많은 여성이 6월 출간된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한 대목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했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박 전 시장의 장례를 서울시장장으로 치르는 것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58만 명 가까운 수가 동의했다. 그런 우리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다음, 다른 세계로 함께 갈 것이다. 피해자가 자신과 가족의, 보통의 일상과 안전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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