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TV직시] 지선우의 세계, 이태오의 세계

등록 2020-05-23 16:06 수정 2020-05-25 09:29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주인공 지선우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뒤 가정을 깨고 나와 본인의 세계를 만들었다. JTBC 제공

드라마 <부부의 세계> 속 주인공 지선우는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뒤 가정을 깨고 나와 본인의 세계를 만들었다. JTBC 제공

JTBC <부부의 세계>가 비지상파 드라마 역대 최고 시청률 28.4%(닐슨코리아)로 막을 내렸다.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믿었던 주인공 지선우(김희애)가 남편 이태오(박해준)의 외도 사실을 알면서 겪는 고통과 애증, 복수의 서사를 무시무시한 속도감으로 펼치며 올 상반기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불륜 드라마’나 ‘막장 드라마’ 같은 말로 단순화하기엔 좀더 복잡하고 지독했던 이 드라마가 던지고 간 판타지와 질문들을 정리했다.

가정에서 나오는 여자, 김희애

<부부의 세계>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김희애의 전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친구의 남편과 외도를 저질러 이혼하게 만드는 이화영을 연기했던 <내 남자의 여자>(SBS·2007)지만, 그가 <아내의 자격>(2012)과 <밀회>(2014)에 이어 세 번째 JTBC 드라마인 <부부의 세계>에서도 이혼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김희애는 영화 <허스토리>(2018)에도 이혼한 사업가로 나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지원하고, 영화 <윤희에게>(2019)에선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긴 채 결혼했다가 이혼한 뒤 첫사랑과 재회한다. 지난 몇 년간 한국 대중문화 속 여성의 이야기가 조금씩 지평을 넓히는 순간마다 그는 ‘가정’을 깨뜨리고 나오는 여성의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부부의 세계>가 초반부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여성이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대신 냉철한 판단력과 행동력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는 판타지를 제공한 덕분이었고 거기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김희애였다.

지선우가 믿은 완벽한 삶이 허상이었던 것처럼, <부부의 세계>의 배경인 고산의 여자들도 겉보기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태오의 외도 상대인 여다경(한소희)의 어머니 엄효정(김선경)은 재력가 남편 여 회장(이경영)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고, 외모가 자산이라 여기며 살아온 만큼 딸의 외모도 엄격하게 품평한다. 지역 유지 최 회장의 부인(서이숙)은 남편에게 성병이 옮은 뒤에도 “(다른 여성과의 성관계는) 남자한테 배설 같은 거”라 정신승리 하며 자리를 지킨다. 가부장제 아래 여성이 획득할 수 있는 지위는 ‘아내의 자리’뿐이기에, 드라마는 이들이 겪는 불안과 모멸감, 여성 간의 갈등과 복잡한 관계를 냉혹하리만큼 극단적인 동시에 현실적으로 그린다.

상습적으로 외도하는 남편 때문에 고통받던 고예림(박선영)은 여다경의 임신 사실을 눈치채고는 그전까지의 방관자적 태도에서 벗어나 지선우와 같은 ‘본처’의 처지에 이입해 ‘상간녀’인 여다경을 호되게 비난한다. 이태오와 결혼한 뒤 새롭게 ‘완벽한’ 가정을 구축하려 필사적이던 여다경의 “내 결혼은 달라”라는 믿음이 허망하게 배반당하는 과정은, 여성이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무리하게 노력하고 인내하는지 보여주며 묻는다. 거기에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당신의 결혼은 정말 다른지.

평범하게 이기적인, 이태오라는 남자

이태오는 <아줌마>(MBC·2000)의 장진구(강석우), <내 남자의 여자>의 홍준표(김상중)에 이어 2000년 이후 한국 드라마 속 3대 불륜남으로 꼽을 만한 캐릭터고, 제작진은 시청자가 그를 혐오할 요소를 일상에 심어두었다. 흰 셔츠를 갈아입지도 않은 채 지선우가 조리 중인 갈비찜을 손으로 집어 깨끗한 싱크대에 국물을 뚝뚝 흘리며 먹고, 지선우가 다림질하는 사이 소파에서 한가롭게 와인잔을 기울이던 이태오는 여다경과 재혼 뒤 지선우와 외도한 사실을 들키고 ‘용서’받자마자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내 남자의 여자>의 홍준표가 이화영에게 음식 투정을 해서 갈등을 빚었던 것처럼, 식탐은 가사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차려진 밥상만을 받아온 이들의 이기적이고 무절제한 품성을 즉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었음을 지우고 “서로 잘못한 건 다 잊자”는 뻔뻔함 역시 같은 맥락 안에 있다.

연인 사이인 박인규(이학주)에게 폭행당하면서도 좀처럼 그를 떠나지 못했던 민현서(심은우)는 이혼 뒤에도 이태오에게 복잡한 감정을 지닌 지선우에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이태오가 박인규를 고용해 지선우를 습격하게 하고, 민현서가 박인규에게 추적당하는 상황은 한국 여성의 현실과 연결해 보면 한층 더 공포스럽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9년 언론에 보도된 살인사건을 분석한 결과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88명이었다. 지선우 같은 배우자 관계의 피해자는 47명, 민현서 같은 데이트 관계의 피해자는 32명이었다. 피해 여성의 미성년 자녀를 납치하거나 살해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국 여다경에게도 이혼당한 이태오가 자신보다 강한 남성인 여 회장의 보호 아래 있는 여다경을 찾아가는 대신, 중학생 아들 준영(전진서)과 지선우를 스토킹하며 그들의 생활에 다시 끼어들려는 태도는 찌질하기 이전에 위협적이다. 가진 게 없는 남자라도, 아니 그래서 더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자를 버린 여자들

행복한 가정의 충실한 수호자로 돌아갔던 <스카이캐슬>(JTBC·2019)의 여성들과 달리, 그리고 많은 ‘줌마렐라’ 드라마의 공식과 달리 고산의 여자들은 남편을 자기 삶에서 내보낸 뒤 새로운 남자 또한 들여놓지 않는다. 지선우는 동료 의사 김윤기(이무생)와 끝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여다경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남성을 가뿐히 무시하며, 고예림은 남편과 재결합하지 않고 카페를 운영한다. 다만 이들이 자기 삶을 되찾거나 새롭게 개척하는 토대는 유능한 전문직 여성이거나 재력가의 딸이기에 가질 수 있는 자산에 있다. 정상가족 신화를 무너뜨리고 결혼의 ‘신성함’을 회의하는 이야기가 찾아낸 새로운 출구는 이토록 매혹적인 한편, 현실의 좁은 문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궁금해진다. <부부의 세계> 이후 드라마 속 여성들은 또 어디로 갈지.

최지은 칼럼니스트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