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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직시] 루피에겐 죄가 없다

여성혐오가 어린이 캐릭터와 닿았을 때 벌어지는 일들
등록 2020-08-10 20:17 수정 2020-08-13 09:48
아동용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루피는 카카오톡 스토어에 이모티콘으로 출시된 지 3시간 만에 판매 중단됐다. 이후 논란을 빚은 이모티콘을 제외하고 다시 판매됐다. <EBS> 화면 갈무리

아동용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루피는 카카오톡 스토어에 이모티콘으로 출시된 지 3시간 만에 판매 중단됐다. 이후 논란을 빚은 이모티콘을 제외하고 다시 판매됐다. <EBS> 화면 갈무리

뽀로로의 친구 루피는 수줍음 많고 상냥한 꼬마 비버다.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가 방영된 EBS 공식 누리집 소개에 따르면 루피는 “따듯한 마음에 여린 심성의 소유자로 말썽쟁이 친구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는 숲속 마을의 모범 소녀”지만, 요즘 포털 사이트에 ‘루피’를 치면 자동 연관검색어로 뜨는 ‘루피 짤’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마동석 루피’ ‘일진 루피’ ‘(비의) 깡 루피’ 등 험상궂거나 불량하거나 허세 부리는 루피의 이미지는 대부분 ‘개그 짤’로 쓰인다.

루피 이모티콘, 3시간 만에 판매 중단

7월24일 <스브스뉴스>에서는 올해 갑자기 인터넷을 휩쓴 ‘루피 짤’의 근원을 찾아나서기도 했다. “(루피 얼굴이) 아바타 기본형처럼 눈썹도 없고 머리카락도 없어서 활용하기 좋다”는 SBS <스브스뉴스> 태디 디자이너의 말대로, 눈매와 입매가 다양하게 변형되고 안경·수염·담배 같은 소품과 헤어스타일에 따라 어떤 캐릭터도 입힐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루피로 새로운 ‘짤’을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상냥하고 마음 여린 ‘본캐’를 뒤집은 개그 코드는 반전 재미와 함께 널리 퍼져나갔다.

<뽀롱뽀롱 뽀로로> 제작사인 아이코닉스의 서혜지 마케터는 ‘루피 짤’이 대거 양산되는 이유에 관해 “오히려 귀엽고 착한 이미지다보니 더 괴롭히고 싶고 망가뜨리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게 아닐까”라고 분석했고, 이두향 디자이너는 “회사원 콘셉트와 엮어 사표를 품고 다니는 마음이라든가 (그런 짤이 나오면) 더 재밌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더 많이 망가뜨려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동용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성인들의 온라인 문화와 만나 만들어진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 문화 콘텐츠)의 아슬아슬한 균형은 곧 망가졌다. 7월31일 카카오톡 이모티콘 스토어에서 출시된 ‘잔망 루피’ 이모티콘은 약 3시간 만에 판매가 중단되고 삭제됐다. 문제가 된 이모티콘은 머리에 리본을 단 루피의 대사로 “오또케 오또케”(‘어떡해’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를 넣은 것과, 루피의 상체를 강하게 때리는 주먹과 함께 “명존쎄”(‘명치를 매우 세게 치다’의 비속어)라는 문구를 적은 것이었다. 수정 전 이모티콘을 산 사용자 일부는 해당 문구에 불쾌감을 표하며 환불을 요청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두 가지 이모티콘이 교체된 수정본이 다시 판매됐다.

온라인 남성 문화 안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오또케 오또케”를 쓰는 건 하루이틀 유행한 것이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다. 한 예로, 2018년 10월3일 업로드된 네이버 웹툰 <캉타우> 7화에 위기 상황에서 책임감 있게 아이를 구하는 남성 경찰이 등장하자, 베스트 댓글에 “여경: 오또케 오또케”가 올랐다. 이 댓글에는 1만5천 명 이상이 ‘좋아요’를 눌렀다. ‘여경, 여군, 여소방관’을 비하한 다음 댓글의 ‘좋아요’ 수는 1만2천 개가 넘었고, 이 회차의 베스트 댓글 다섯 개는 모두 ‘여경’을 비난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처럼 여성, 특히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남초 직군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쉽게 비하와 조롱의 표적이 된다. 이런 표현을 쓰는 이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나 능력이 부족하다며 자신들의 혐오 표현이 정당한 것처럼 주장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뇌피셜’(뇌와 오피셜의 합성어. 자신의 생각을 근거로 한 주장)에 불과하다.

논란을 빚은 이모티콘.

논란을 빚은 이모티콘.


여성 경찰을 비하하는 말로 쓰인 ‘오또케’

2019년 7월,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에서는 ‘대림동 여경 사건’이라고 부르는 ‘구로동 주취자 경찰관 폭행 사건’ 당시 여성 경찰이 남성 시민에게 도움을 청한 것처럼 알려져 비난받은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 남성 경찰, 여성 경찰, 여성 시민의 대화가 잘못 보도된 것임을 밝혔다. 이 방송에서는 같은 해 3월 서울 관악구 한 초등학교 앞에서 흉기를 들고 난동 부리던 한 남성을 여러 명의 남성 경찰이 제압해 검거하는 동안, 여성 경찰 두 명은 ‘뒷짐 지고 보거나 스마트폰만 사용했다’는 식으로 보도된 것도 사실관계를 확인했다. 경찰에 따르면 스마트폰을 사용한 여성 경찰은 인근 지구대 지원 인력으로 부상자가 생기자 119에 신고하던 상황이었고, ‘구경하던 여경’으로 알려졌던 인물은 제작진이 수소문한 결과 단발머리에 모자를 쓴 60대 남성 주민이었다.

여성 경찰이자 에세이 <경찰관 속으로>의 저자인 원도 작가는 강력사건이 일어났을 때 “테이저건 카트리지, 쉽게 말해서 총알이 비싸다고 예산 부족을 이유로 못 쓰게 하는” 환경과 “적극적인 업무 처리를 하면 할수록 직장 내에서 입지가 위태로워지고, 잘못된다면 몇 년치 연봉만큼의 액수를 물어줘야 하거나 아예 직장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해 책에 쓰기도 했다. ‘여경’ 이전에 경찰로서의 고민이다. 그러나 여성 경찰을 ‘치안조무사’라며 비하하고 ‘여경무용론’을 펼치는 남성들에게 이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경’처럼 기사 제목에 오르내리지 않을 뿐인 ‘남경’의 성범죄나 불법촬영 범죄 또한 그들에게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남성들에게 여성은 실재하는 인간이 아니라 “오또케 오또케”라는 프레임에 갇혀 영원히 조롱당해 마땅한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평등 의식 없을 땐 언제든 재발 가능한

‘잔망 루피’ 이모티콘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은, 이처럼 명백히 여성혐오적 맥락으로 쓰였던 표현이 아동용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이용한 공식 상품을 통해 너무나 무신경하게 유해성을 드러냈다는 면에서 상징적이다. 이는 온라인에서 유행한 B급 문화를 차용해 수익 상품을 개발하며 최소한의 필터링조차 거치지 않을 경우, 특히 콘텐츠 제작자와 의사결정권자에게 성평등 의식이나 폭력에 관한 감수성이 부족할 경우 어떻게 리스크 관리에 실패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루피에겐 죄가 없다. 그러나 루피를 망가뜨린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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