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이하 ) 홈페이지에는 ‘다시보기’가 없다. 12월10일, 유튜브 라이브에서 ‘당당맨’ 최영수(35)가 ‘하니’ 채연(15)의 팔을 주먹으로 때리는 듯한 장면과 ‘먹니’ 박동근(37)이 채연에게 “독한 ×” “리스테린 소독한 ×” 등의 발언을 잇달아 하는 장면이 방송된 뒤 시청자 게시판에는 수천 건의 항의 글이 올라왔다. “해당 폭행 논란은 전혀 사실이 아니니 추측과 오해는 자제해달라”던 EBS의 초기 대응은 상황을 급속도로 악화시켰고, “허물없이 지내다보니 이어진 심한 장난”이라는 제작진 사과문은 미성년자가 출연하는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의 제작진이 폭력과 위력에 관한 기본 인식조차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결국, 김명중 EBS 사장이 “폭력적인 장면과 언어 성희롱 장면”에 대해 사과하고 두 남성 출연자 하차, 관련 영상 삭제, 제작 책임자 보직 해임, 제작진 전면 교체, 방송 잠정 중단, ‘다시보기’ 서비스 중단 등의 조치를 단행하면서 사태는 간신히 일단락됐다.
조카-삼촌 같은 관계라 하더라도최영수는 인터뷰에서 “채연이랑 조카와 삼촌, 친동생과 오빠, 그 이상으로 친하다”며 “평소에 보는 사람들에겐 너무 익숙한” 장면일 거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조용히 얌전하게 평생 잘해온 나 같은 사람한테 세상이 왜 이러나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최영수의 발언은 왜 사태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보여준다.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여성과 가족 이상으로 ‘친하다’고 여기며 위협적인 포즈를 취하는 건 나이 권력에서 우위에 선 쪽의 입장에 불과하며 심지어 친족 관계라 해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동이다. 13년째 출연해온 그와, 1년차 ‘하니’인 채연이 과연 현장에서 동등한 위치냐는 질문도 필요하다. 또한 그런 장면을 정말 ‘익숙’하게 여긴다면 를 만들거나 보는 이들은 이미 장난을 가장한 폭력에 무뎌진 상태였다는 얘기다. 문제는 ‘세상’이 점점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3년 전, 그리고 단 1년 전과도 말이다.
2018년 2월, EBS 시청자위원회 회의에서는 이미 성인 출연자들의 언행에 관한 지적이 있었다. 조혜영 부위원장은 “개그맨들이 캐릭터를 희화화해 재미를 유발하려다보니 존중의 언어가 아니라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오는 어투를 쓰는 것 등이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고, 장준영 위원은 “아이들은 재미있게 볼 것 같지만 아이들끼리 문화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회의에 출석한 담당 PD는 “그 가공의 캐릭터가 보니, 하니의 친구인 설정”이라 설명하며, “생방송이다보니 액션이 현장에서 조금 과격하게 보인다거나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출연자들과 소통하고 고민하는 지점이며, 늘 톤을 조절하려 한다”고 답했다.
논란 이전부터 폭력성 지적돼그러나 최근 재조명된 장면들은 남성 코미디언들이 미성년자인 보니와 하니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거나, 입에 손가락을 넣거나, 물을 뿌리거나, 몸을 때리면서 놀리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11월에도 시청자 게시판에는 “장난처럼 보이지만 장난을 가장한 폭력”이라거나, “(누군가) 벌칙을 받는 행위가 결코 다른 이들의 즐거움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기 바란다” 등 전반의 폭력성에 관한 지적이 올라왔다. 지난 10월에는 초등교사이자 두 아이를 양육하는 시청자가 “보니와 하니가 다양한 게임을 통해 수행하는 벌칙이 꼭 우스꽝스럽거나 다른 지상파나 종편 채널의 예능을 따라할 필요가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가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은 최근이지만, 어린이 프로그램으로서 정체성과 방향은 진작 재정비돼야 했다.
물론 이는 와 EBS만을 향해 던져야 할 질문은 아니다. 2016년 1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에서 펴낸 ‘어린이·청소년 출연 TV 프로그램 내용 분석’ 보고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 어린이나 청소년에 대한 보호나 배려에 대한 인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보고서는 “성인 출연자들은 어린이·청소년 출연자들에게 성인의 관점에서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식을 요청하거나 어린이·청소년 출연자를 자신의 이성적 대상으로 상정하면서도 이를 ‘삼촌-조카 관계’와 같이 관습에 기댄 방식으로 미화 또는 정당화하고 있다”는 문제도 중요하게 지적한다.
‘문제적’ 한국 예능미성년자 여성은 성인처럼 소비하고, 성인 여성은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는 한국 예능계의 악습에는 그동안 브레이크가 없었다. 채연이 속한 ‘버스터즈’를 비롯한 걸그룹 멤버들은 미성년자여도 미디어에서 ‘성인 남성이 선호하는 여성’으로만 존재 가치를 가질 수 있고, 성인이라면 더욱 어리고 수동적인 이미지를 요구받는다.
2016년 JTBC 에선 40대 후반의 강호동과 그보다 25살 어린 걸그룹 멤버가 연인 사이라는 상황극을 연출했다. 약속에 늦은 여성에게 거구의 강호동이 주먹을 치켜들며 “죽고 싶어?”라고 외치고, 상대의 ‘애교’로 이 상황이 즐겁게 마무리된 것에 대한 논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권력 구조의 하단에 있는, 약자에 대한 폭력을 ‘장난’이자 예능 기법으로 수용해온 결과 미성년자나 갓 성인이 된 여성 연예인에 대한 폭력 상황은 ‘가상’과 현실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tvN 에서는 성인 남성이 미성년자 여성에게 전화번호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위력을 사용하는 콩트가 방송됐고, 최근 MBC 녹화 현장에선 한 남성 스태프가 걸그룹 멤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장면이 포착됐다.
사태는 두 개그맨의 ‘일탈’이 아니라 한국 방송계 전반의 ‘문화’에서 비롯됐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누구보다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이토록 문제적 환경에 던져져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드러났다는 면에서 누구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하니’가 존중받지 못하는 세계에선 누구도 존중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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