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듣명’(숨어 듣는 명곡)이라는 말이 있다. 가사나 콘셉트가 다소 유치하거나 황당해 내가 듣는다는 사실을 남에게 숨기고 싶지만, 묘한 중독성이 있어 몰래라도 듣게 되는 노래를 의미한다. 빠른 비트와 독특한 후렴구, 작사가를 심문하고 싶은 가사가 핵심이다보니 대개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이다. 그러나 아무 곡이나 ‘숨듣명’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구절이 혼돈의 도가니인 제국의아이들 데뷔곡 <마젤토브>, 특유의 ‘뽕끼’로 ‘숨듣명’ 강자가 된 파이브돌스의 대표곡 <이러쿵저러쿵>, 여자친구 몰래 바람피우는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화자의 윤리성이 뒤늦게 심판대에 오른 틴탑의 <향수 뿌리지 마>, 그리고 물론 비의 <깡>도 여기에 속한다.
MC로 끌어올리고 새로운 전기를 맞게 하고
몇 년 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특정 문화 콘텐츠 등)으로 떠돌던 ‘숨듣명’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은 유튜브 <문명특급> 채널이다. 2018년 11월,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을 강타했던 노래”들을 중심으로 ‘숨듣명’ 리스트를 꼽은 뒤 파이브돌스 멤버 서은교를 MC 재재(이은재 PD)가 인터뷰한 영상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숨듣명’은 <문명특급>을 대표하는 시리즈로 자리잡았다. <마젤토브>의 작사·작곡가 한상원, <삐리빠빠>의 나르샤, <야야야>를 부른 티아라 효민 등이 출연해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줄 때마다 음원이 역주행하거나 가수의 화제성이 높아졌다. “군대 전역하고 계속 집에 있었다”던 유키스 수현은 <문명특급> 출연으로 호감도가 상승해 드림콘서트 레드카펫 MC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고, 틴탑 역시 니엘의 <문명특급> 출연 이후 지난 활동 전반이 재조명되며 데뷔 10주년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숨듣명’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다보니 8월19일 Mnet 에서는 ‘숨어 듣는 명곡 Best 10’이라는 주제로 방송을 진행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물론 트렌드나 밈에 저작권을 따지기는 어렵다. 대표적인 ‘숨듣명’ 리스트는 정해져 있으니 10곡 중 8곡이 <문명특급>에서 이미 소개된 것과 겹칠 수 있다. 그러나 <문명특급>에서 이미 짚어낸 재미 포인트와 가수의 캐릭터까지 그대로 활용했다는 점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문명특급>이 그동안 해온 작업은 단순히 온라인에서 언급되는 ‘웃긴 노래’ 몇 곡을 소환한 것이 아니라, 출연자들이 이른바 ‘잘나가는’ 가수가 아니라도 충분히 존중하고 그들이 우스워 보이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꾸준히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때보다 생기 있는 아이돌
‘숨듣명’과 함께 <문명특급>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시리즈는 ‘컴백 맛집’으로 불리는 케이팝 아이돌의 인터뷰다. 특히 사소한 이유로도 트집을 잡히고 ‘논란’에 휩싸이다보니 매사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걸그룹 멤버들이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서보다 훨씬 편안한 태도로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연반인’(연예인 겸 일반인) 재재는 마치 공 세 개로 저글링을 하듯 출연자를 쉴 새 없이 웃기고 놀리고 칭찬하며 긴장을 풀어준다. 그는 가수에게 안무를 보여달라고 하는 대신 직접 춤을 추고, 개인기를 요구하는 대신 자신이 개인기를 펼쳐 상대를 웃게 한다.
케이팝 시장에서 사라져야 할 병폐이자 에이핑크 멤버들이 최악의 요구 중 하나로 꼽은 ‘애교’는 <문명특급>에서 아예 금지다. 연애나 결혼 등 사생활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대신 선미에게는 작사·작곡을 통한 성취에 관해 묻고, 여자친구의 유주가 무대에서 넘어지자마자 일어나 계속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을 당시의 아픔에 관해서는 함께 화내며 들어준다. 예능의 관성에서 벗어난 진행은 새로운 재미를 이끌어낸다. 몇 년 전 MBC <라디오스타>에서 개인기를 요구하는 MC 김구라에게 “개인기가 없다”고 답해 “요즘 아이돌 중 보기 드물게 무기력한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며 ‘표정 논란’에 휘말렸던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문명특급>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기 있고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부분의 미디어가 ‘케이팝 세계화’에 주목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동안 정작 그 시장의 종사자인 아이돌은 존중받지 못했다. 고된 육체노동과 혹독한 감정노동을 수행하면서도 방송에서 일종의 ‘소모품’처럼 취급됐다. 그런데 <문명특급>에 출연했던 아이돌들이 “데뷔하고 가장 편하게 한 방송”이라거나 “편한 언니랑 논 것 같다”는 출연 소감을 남기는 현상이야말로 주목할 만하다.
2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들이 먼저
홍민지 PD가 7월 초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돌판에 균열을 내자’라는 글에 그 답이 있다. 생면부지의 신인 아이돌이 자신에게 90도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문제의식을 느꼈던 그는 “아이돌을 전문 직업으로 대우”하며, 그들이 “안 웃기면 웃을 필요 없고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다. “대중에게 ‘비호감’으로 인식되지 않게 하는 것은 연출과 편집의 영역이다. 앞뒤 말이 잘못 잘리면 오해를 부를 수 있고, 시청자에게 왜곡된 모습으로 전달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그의 입장은 제작진의 책임 영역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출연자에 대한 우려만이 아니라, 시청자를 위해 혐오 표현을 걸러내고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방송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의 동시대적 맥락을 매우 섬세하게, 부지런히 읽어내야만 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것은 아이돌을 다룰 때만 해당하는 원칙이 아니라 예능 전반, 나아가 미디어 종사자 모두에게 필요한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이 중요한 숙제를 2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들로 구성된 <문명특급> 팀에서 먼저 제출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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