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모처에 위치한 목련고등학교에는 남다른 보건교사가 있다. 죽은 사람을 볼 뿐 아니라, 죽고 산 자들이 뿜어내는 욕망의 응집체 ‘젤리’를 볼 수 있으며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젤리를 처치할 수도 있는 능력자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히어로의 운명을 타고난 자의 멋진 독백 같지만, 중요한 건 마지막 한마디다. “씨발.” 원한 적 없는 재능 때문에 늘 피곤한,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선한 시민 안은영은 2015년 정세랑 작가의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2020년 9월25일, 정세랑 작가가 극본에 참여하고 이경미 감독이 연출을 맡은 동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공개됐다.
22발 비비탄 총과 15분 사용 플라스틱 칼
평범하지 않은 안은영(정유미)의 세상은 평온하지 못하다. 뜨거운 청춘들이 학교에서 피워내는 ‘에로에로 젤리’는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살아간다는 것이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임을 일찌감치 깨달은 그의 눈에만 보이는 세상이다. 죽은 채로 오랫동안 놀이터를 떠도는 어린 영혼 정현, 안은영의 십 대 시절 화재로 세상을 떠난 인근 학교 ‘언니들’ 모습(드라마에서는 인천 호프집 화재 참사가, 소설에서는 군산 성매매업소 화재 참사가 연상되는 사건이다), 산업재해인 크레인 사고로 사망한 친구 김강선(최준영)까지, 그가 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하는 슬픔과 아픔은 너무나 많다. 게다가 남다른 신체 능력이나 고기능성 슈트도 없는 히어로 안은영의 무기는 하루에 스물두 발 쏠 수 있는 비비탄 총과 15분 동안 쓸 수 있는 플라스틱 칼이 전부다. 한계가 있는데 하필 선의도 있어서 세상을 향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친절함을 베풀다 지치고 다치는 그에게, 젤리를 팔아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또 다른 능력자인 원어민 교사 매켄지(유태오)는 말한다. “나는 너같이 실속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끝나는지 너무 자주 봤어. 보통은 싸우다 죽지. 근데 가난하게 혼자 죽는다. 아무도 몰라, 너희들이 뭐 하다가 죽는지.”
반경 5.38㎞ 안에서 수십 번 태어나 죽기를 반복하며 사람들의 불운, ‘옴’을 잡아먹는 ‘옴잡이’ 백혜민(송희준)은 안은영과 비슷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다. 스무 살이 되면 죽는 그는 이번 생을 더 살아보고 싶지만, 자신이 인간이 되면 이번 생에 만난 친구들을 지킬 수 없다며 늘 그래왔듯 생을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은영은 “학교는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까” 수술을 받아 사람이 되라고 백혜민의 등을 떠민다. “죽겠다, 힘들다”와 더불어 “씨발”을 숨 쉬듯 내뱉으면서도 안은영은 멈추지 않는다. 속 썩이는 학생들 때문에 “아, 그냥 씨발 다들 졸업해버려. 썅, 쯧!”이라고 투덜대면서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주의 깊게 찾아내고, 커다란 의료용 더미(dummy)를 업고 전교를 돌며 응급처치법을 가르친다.
경쾌한 성역할 전복, 적나라한 혐오의 광기
학교 설립자의 손자이자 한문 교사 홍인표(남주혁)는 안은영을 위한 ‘힐러’이자 일종의 보조 배터리다. 할아버지에게 좋은 기운과 보호막을 물려받은 그는 안은영에게 순순히 손을 맡겨 충전을 돕는 쓸모 있고 무해한 남자로, 가장 인상적인 그의 대사는 “(돌풍에 휘말린 학생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아이고, 다 날아가네!”다. 큰일은 여자가 하고 남자는 뒤따르는 성역할 전복적 아이디어는 드라마에서 좀더 강화됐다. 원작에서 남학생 짝패였던 ‘럭키’와 ‘혼란’ 중 사건사고를 주도하는 ‘럭키’가 여학생 허완수(심달기)로 바뀐 것은 신선하고, 짝사랑 상대인 매켄지의 집에 몰래 들어간 여학생 에피소드가 매켄지로부터 도움을 받는 농구부 남학생 이지형(권영찬)의 이야기로 변경된 것은 사려 깊은 각색으로 보인다.
이야기 배경인 목련고는 영화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만든 이경미 감독 인장이 찍힌 듯한 공간이다. 거대하고 수상한 설립자 동상과 초상화, 교장 인솔에 따라 학생들이 겨드랑이를 두드리며 웃음 체조를 하는 광경에는 그로테스크한 유머 감각이 배어난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2016년 <씨네21>에 쓴 <비밀은 없다> 리뷰에서 이경미 감독이 그려낸 중학생 여자아이들의 세계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으로 ‘중2병’이라는 생기 없는 단어 밑에 은폐되는 이 세계의 멘털리티를 이경미처럼 겁없고 염치없고 난폭하고 뻔뻔스럽게 그려낸 예가 있었던가?” 무대가 바뀌었어도 그 공기는 여전하다. 목련고 학생들은 KBS <학교> 시리즈나 풋풋한 청춘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뽀얗고 산뜻하지 않다. 이들은 대개 땀에 절어 있거나 얼굴이 벌겋게 달구어져 있거나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거나 괴성을 지르고 뒷일을 생각하지 않은 채 사고를 친다. 학교에 나쁜 기운이 퍼지는 바람에 동성애, 장애, 가난을 조롱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된 학생과 교사들의 모습은 혐오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음 시즌까지 “보-건, 보건교사다-”
시즌제 가능성이 있는 기획이라서인지 전체적인 서사에는 불친절하게 생략된 부분이 적지 않다. 드라마에서 새롭게 생겨난 설정인 신흥 종교집단 ‘안전한 행복’과 그 계파였던 ‘일광 소독’의 알력, 안은영의 좋은 언니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일광 소독’의 수장인 화수(문소리)의 목적, ‘안전한 행복’에 포섭된 교사들과 학생의 행보,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뜬금없이 느껴졌을 오리 떼의 움직임까지 다음 시즌이 나온다면 풀어야 할 이야기가 잔뜩 쌓여 있다. 물론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의 귓가엔 그때까지 “보-건, 보건교사다-/ 나를 아느냐-?/ 나는 안은영-”의 중독적 가락이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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