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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

등록 2019-05-17 13:53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예전에 남자 지인이 “나는 페미니즘을 지향하지 않는다. 휴머니즘을 지향한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의아하긴 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다른 남자에게 비슷한 말을 또 들었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휴머니스트다.” 연령, 상황, 조건이 전혀 다른 두 남성이 공통적으로 자신을 휴머니스트로 규정하면서 페미니스트로 불리기를 거부하는 것은 왜일까.

<font size="4"><font color="#008ABD">더 우월한 ‘이즘’이 있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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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은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말과 다르게 들리지만, 더 우월한 이즘(주의)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휴머니즘을 인류 보편의 가치로, 페미니즘을 특정 집단의 가치로 이분화하는지 모른다. 근대적 세계관의 토대가 된 휴머니즘은 중세를 종식하고 신의 권위 아래 억압받던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이었다. 시대에 따라 여러 사상과 결부되어 변화했지만 공통적으로 ‘인간다움’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다움의 ‘인간’은 누구인가?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인식을 요구한다.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자명한 명제가 급진적인 주장이 되어야 했던 이유는, 남성의 이야기만 역사(History)가 되고 남성만이 영웅(Hero)이었던 긴 세월 동안,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정치·경제·문화·종교 등 공적 영역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여성의 자리는 사적 영역인 가정에 국한됐다. 지금은 다르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가정과 직장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 그러다 한쪽을 포기하는 사람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휴머니즘이 페미니즘보다 거시적인 가치라는 생각은, 인간다움의 ‘인간’에 개입된 젠더 권력의 불평등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는 데서 비롯된다.

또한 이런 생각은 페미니즘을 성별 대립이라는 협소한 틀로 바라보는 오류를 범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포괄적으로 권력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차별과 폭력은 계급, 인종, 성정체성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작동한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사회에서 주입받아온 가치관과 자기도 모르게 내면화한 절대적 진리를 스스로 해체하는 과정을 겪는다. 기존의 상식과 경험을 재해석하는 인식론의 변화를 겪으며 연대의 중요성을 알아가고, 페미니즘의 구호인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과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깨우친다.

우리 가운데 성별, 계급, 나이 등의 권력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약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이 ‘언제나’ 인간다움의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여성도 인간’이라는 명제에서 주어는 고정적이지 않다. 이 자리에는 목소리가 있어도 감히 말할 수 없는 모든 이가 들어갈 수 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성소수자도 인간이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난민도 인간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페미니즘의 출발과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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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교회의 강력한 권위로부터 해방되려 했던 중세의 휴머니즘은 불온하고 저항적인 언어였다. 그러나 오늘날 휴머니즘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안전한 언어다. 그래서 ‘페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이란 말은, 안전한 언어 뒤에 숨어 현시대의 저항적 언어와 거리 두기를 한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페미니즘의 출발 지점은 ‘여성’이라는 젠더 문제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도착 지점은 인종·계층·장애·성적 지향 등 다양한 근거로 차별받고, 소외당하고, 2등 인간으로 살아가는 주변인과 소수자들이 온전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다.”(강남순, ) 그렇다. 페미니즘이 닿으려는 곳은 ‘온전한 인간들의 사회’다.

하재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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