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방송(EBS) <파더 쇼크>. EBS 제공
애아빠가 어느 날 “아빠 어릴 때 영어 테이프 같은 거 들으면서 공부 안 했거든. 그래서 듣고 말하는 게 자신 없어. 너 영어 울렁증 알아? 아빠 영어 울렁증이야.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넌 영어만큼은 제대로 했으면 좋겠어”라고 자기 약점까지 드러내며 아이한테 간곡히 공부를 종용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애고, 그럼 아빠 지금이라도 공부해. 아빠도 할 수 있어. 유 캔 두 잇!”
둘 다 미래지향적인데 장르는 왜 이리 다를까. 아이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쪽이고, 아비는 앞날을 미리 걱정하는 쪽이랄까. 이어지는 애아빠의 말은 이랬다. “어? 어.” 군더더기 없고 포기가 빠른 것은 어쩜 그리 닮았는지.
많은 정보가 부모에게 ‘아이 눈높이’에 맞출 것을 강조하지만 나는 아비와 자식 관계도 둘 사이의 ‘케미’(궁합)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기질과 성향이 크게 작용한다. 한마디로 ‘아비 눈높이’도 그만큼 중요하다.
많은 아빠가 아이에게 사춘기가 오면 덩달아 방황한다. 심지어 더 방황한다. 유아기 때 어찌할 수 없어 돌보다 학령기에 이르면서 한숨 놓고 생업에 매진했는데 어느 날 문득 보니 아이는 훌쩍 커 있다. 그새 아빠는 이리저리 꺾여 사회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후달리는’ 중인데 말이다. 마음이 바빠진다. 허둥대느라 스텝이 더 꼬인다.
가령 아이가 게임에 빠져 있다. 안 되겠다. 아빠가 너무 무심했구나. 이제 주말에 같이 운동하자. 배드민턴채 들고 나가 몸 바쳐 뛰었다(축구·농구는 잘되지 않으니). 분식집에 가서 푸짐히 시켜놓고 인생 선배로서 좋은 말도 해줬다.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에 왔다. 어떻게 될까.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아빠랑 놀아줬으니까 이제 게임 해도 되지?” 그나마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우씨, 이제 아빠랑 나가서 밥 먹으라고 하지 마. 쪽팔려.”
오랫동안 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혹은 애엄마가 알아서 하니까 한발 떨어져 양육을 ‘면제’받았던 아비라면 그것이 사실상 ‘배제’였다는 것을 처절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공부 욕심, 성취 욕심까지 부린다면 아이랑 틀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어떤 충고도 아이에게는 난데없는 잔소리로만 접수된다. 체면이 있으니 아비는 대놓고 요구하지는 못하고 주로 말투나 태도를 트집 잡는 식으로 시작된다. 그러다 큰소리라도 나올라치면 그토록 싫었던 자기 아버지 모습이 소환된다. 가부장적이고 군림하던 이전 시대의 아버지 말이다. 자괴감에 시달린다. 설상가상 아이 휴대전화에 ‘또라이’ ‘개짜증’으로 저장된 내 번호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듣던 중 가장 ‘웃픈’ 이름은 ‘누구세요’였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아버지상만큼 격변한 게 있을까. 어떤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인지 겪은 적도 본 적도 없는데, 돈도 벌어야 하고 가족에게는 잘해야 하며 아이에게는 친구 같기까지 해야 하다니. 게다가 공감과 소통은 어쩔…. 대혼란이다. 몇 년 전 교육방송(EBS) 제작팀은 이를 라 이름 붙였다. 전작 만큼 화제가 되지 않아서 더 안타까운 ‘쇼크’다.
나는 아빠들에게 해결사 노릇을 내려놓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냥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어렵다고 피하거나 잘하려 무리하지 말고 말이다. 아이와 잘 지내는 방법을 영 모르겠거든 아내와 잘 지내면 된다. 헤어진 부부라도 그 조건에 맞게 원만히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고민과 걱정이 있다면 털어놓고, 때론 욕심이나 한계도 솔직히 말하고 선택은 아이가 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도 제가 한 선택에는 후회나 미련이 적다. 그렇게 하나씩 결정권을 넘겨주는 일이 양육의 과정이 아닐까.
좋은 아빠는 울타리를 넓게 쳐주는 아빠 같다. 누가 더 넓게 쳐주는지는 옆집 아빠, 누구 아빠가 아닌 아이 엄마와 경쟁할 일이다. 우리, 알지 않나. 내 인생 내가 사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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