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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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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저씨’를 갱생시켜야 내일이 온다

동명 웹툰 각색한 KBS 드라마 <죽어도 좋아>
등록 2018-12-01 17:44 수정 2020-05-03 04:29
KBS 직장 드라마 <죽어도 좋아> 포스터KBS 누리집 갈무리

KBS 직장 드라마 <죽어도 좋아> 포스터KBS 누리집 갈무리

미운 상사가 죽는다. 그것도 내가 죽으라는 말만 하면. 트럭에 치여서, 맨홀에 빠져서,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서, 떨어지는 시계에 맞아서, 심지어 집 안에서 벼락에 맞아 죽기도 한다.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 그놈을 죽이고 싶어 해도 죽는다. 내 탓만은 아니다. 문제는 상사가 죽을 때마다 오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내가 내일로 가기 위해선 바로 그, 죽이고 싶은 상사를 살려야 한다. KBS 의 이루다(백진희) 대리는 그렇게 백진상(강지환) 팀장의 지킴이가 된다.

원작보다 ‘한국형 오피스 드라마’에 한 발짝

는 2015년 ‘오늘의 우리 만화’ 상을 받은 골드키위새 작가의 동명 웹툰을 각색한 작품이다. 치가 떨리도록 싫은 상사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 죽을 때마다 하루가 반복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그를 구해야 하는 주인공의 고충이 작가의 탁월한 코미디 감각과 맞물려 사랑받았다. 특히 얼굴은 잘생겼지만 “요즘 여자들”을 입에 달고 다니며 온갖 차별과 혐오 발언을 숨 쉬듯 내뱉던 무능한 꼰대 상사 백 과장은 그린 듯한 ‘개저씨’(나이나 지위를 내세워 약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중년 남성을 뜻하는 신조어) 캐릭터로, 원작은 수많은 ‘타임루프’(시간여행) 끝에 그가 누군가에게 ‘싫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게 만드는 일종의 ‘백 과장 갱생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두 가지다. 백 과장이 말하기 전에 생각이란 걸 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이루다가 자신에게 ‘여지’를 주고 ‘오해’하게 했다며 스무 살은 어린 부하 직원과의 결혼을 혼자 꿈꾸던 백 과장의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악덕 상사의 속성을 지니고 있던 웹툰 속 백 과장과 달리 드라마 속 백 팀장은 원칙과 상식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엘리트 독설가로 그려진다. 일과 육아, 임신의 삼중고로 허덕이는 최민주(류현경) 대리에게 회사를 그만두라며 비아냥대다 “나라에선 낳으라고 지랄이지, 회사에선 일보다 애가 더 중하냐고 염병이지, 뭘 어쩌라는 건데?”라고 일갈하는 이루다에게 멱살을 잡히긴 하지만, 그는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까칠하고 사회성 떨어지나 유능한 실장님’이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부하 직원들을 매섭게 비난하는 상사이면서 부당한 인사평가 지시를 내린 경영진에 맞설 만큼 약자와 강자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밀어붙일 만큼 융통성 없게 공정한 인물이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괜찮은 면이 있고 그렇게 행동하는 나름의 이유도 주어졌다. 원작 속 50대 초반이던 백 과장에 비해 연령대가 낮아지며 서른 살인 이루다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도 커졌다. 탐욕스러운 경영진과 소시민적 사연을 지닌 직원들이 더해지며 는 한국형 오피스 드라마의 전형에 더욱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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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손자로 재탄생한 강 과장 아쉬워
KBS 직장 드라마 <죽어도 좋아> 극중 한 장면. KBS 누리집 갈무리

KBS 직장 드라마 <죽어도 좋아> 극중 한 장면. KBS 누리집 갈무리

물론 웹툰과의 ‘싱크로율’(정확도)이 높아야만 좋은 드라마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원작이 새로운 미디어에 맞게 각색되는 것은 당연하고, 드라마 는 서로 죽일 듯 충돌하면서 어쩔 수 없이 손잡게 된 이루다와 백진상이 벌이는 사건들을 시끌벅적한 톤의 코미디로 풀어낸다. 백진희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씩씩하며 능청스러운 이루다의 에너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강지환 역시 원래 잘했던 ‘괴팍하고 잘난 남자’를 능숙하게 연기한다. 회사에선 무난하게 중간만 하는 게 목표였던 이루다가 타임루프에 빠지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동료들과 연대하고 부조리에 맞서는 성장의 과정도 흥미롭다.

반면 강준호 과장(공명) 캐릭터는 드라마로 이식되면서 가장 큰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다. 원작 속 이루다의 직장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강 대리는 백 과장과 정반대로 조신하고 다정하며 지나칠 정도로 이타심이 깊은 남성이었다.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무의식중에 드러냈다가 이루다의 지적을 받자 즉시 사과하고 조심한다는 면에서 무해함이 매력이자 로맨스 상대의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캐릭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마 속 강 과장은 이들이 다니는 MW 치킨 모기업 창업주의 손자이면서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루다에게 관심이 생기는 바람에 회사 일에도 관심 갖게 되는, 전형적인 ‘사랑에 빠져 각성하는 한량형 후계자’다. 외국 펀드 투자 실패로 손해를 본 사장(인교진)이 직원 연봉을 동결하고 복지를 축소하려 하자, 이루다는 기밀 문건을 직원들에게 뿌린 뒤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발을 동동거리며 시간을 되돌린다. 하지만 강 과장은 타임루프라는 초능력을 쓰지 않아도 이미 ‘금수저’라는 초능력을 가진 존재다. 그는 사람을 써서 인터넷에 회사를 비판하는 글을 도배하기도 하고, 사장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도청할 수도 있고, 사내 메신저를 도용해 직원 여론을 바꾸기도 하고, 모 기업 감사팀에 사장인 삼촌의 잘못을 제보하기도 한다. 이루다는 그에게 고마워하며 “위험할지도 모르는데…”라고 말하지만, 아무런 위험부담 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타고난 능력이다. 일종의 해사 행위를 저질렀어도 회장인 할아버지에게 칭찬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하루를 수없이 되돌려서라도 삶을 복구하고 유지해야 하는 이루다, 백진상과 그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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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보다 더 진상스러운 왕자님

불행 중 다행이랄지, 이루다는 강 과장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스물여덟이나 먹어선 편식하며 투정 부리고, 이루다의 어깨에 멋대로 손을 올리며 백 팀장과의 관계를 추궁하고, 좋아한다고 윽박지르다 못해 길에서 소리까지 지르는 그는 어떤 면에선 백진상보다 더 진상스러운 남자다. 만약 강 과장의 존재가 후계자 ‘왕자님’의 효용이 끝났음을 보여주려는 풍자적 의도라면 성공인지도 모르겠다. 이루다에게 필요한 건 내일이지 왕자도 실장님도 아닐 테니까.

최지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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