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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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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부모, 초라한 아이

부모의 기대가 높을수록 작아지는 아이…

모범 소년 표류기 <수레바퀴 아래서>
등록 2018-09-16 20:34 수정 2020-05-03 04:29

비상한 두뇌로 소문난 고교생 진은 늘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고 인간관계에 서툴며 지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진은 소심하지만 선량한 모범생이다. 실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적을 내고 있다. 극단적인 자기 비하에 시달리던 진, 헤르만 헤세의 를 읽는다. 진처럼, 끊임없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모범 소년 한스의 이야기다.

몇백 년 만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비범한 소년 한스는 주 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하고 신학교에 입학한다. 목사나 교수가 되리라는 기대를 배반하고 신학교를 중퇴한 뒤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는다. 그의 전락에 한 소년과의 치명적 우정이 한몫했다.

왜 소년은 소년에게 매혹되는가

모범 소년 한스는 방탕한 천재 하일너에게 매혹된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다. 한스는 신학교 입학 뒤에도 성취와 승리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쉼 없이 자신을 채찍질한다. 반대로 시인 하일너는 열정적이고 자유롭다. 섬뜩한 천재성을 지녔으나, 학교 공부를 위선이나 바보짓이라고 조롱한다. 학교와 인생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과격하다 못해 혁명적이다.

서로에게 깊이 반한 두 사람은 첫사랑이나 다름없는 우정을 키워간다. 실제 그들은 입맞춤을 나누기도 한다. 하일너와의 위대하고 고귀한 우정에 비하면 의무적인 공부는 아무 의미 없기에, 한스는 공부를 손에서 놓는다. 학교와 친구들을 냉소적으로 공격했던 하일너가 고립되면서 한스도 덩달아 따돌려진다. 한스는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학교를 떠난다.

청소년은 이따금 동성 친구에게 매혹된다. 끌림과 사귐의 여정은 연애와 흡사하다. 그를 사귀고 싶어서 열병을 앓고, 극적인 과정을 거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지난 세월의 아픔을 위로받으며, 그의 어둠을 안아주고 싶다. 그가 다른 아이를 더 좋아하는 듯해 상처 받고, 자신을 가장 특별하게 여겨주길 바란다. 딱 첫사랑의 리허설이다.

이때 성적 취향을 서둘러 의심하지 마시라. 이는 동성애적 성향의 전조라기보다 성장기 청소년에게 상당히 보편적인 통과의례다. 세계문학은 동성 친구에 대한 매혹으로 열병을 앓았던 소년 소녀들로 즐비하다. 그들은 대개 불과 몇 년 뒤에, 그리고 평생 이성과 사랑을 나눈다.

청소년이 뜨겁게 끌리는 상대는 주로 자기와 정반대 성향의 아이다. 반대의 세계는 매혹적이다. 자기가 모르는 세상의 비밀이 웅성거리고 있을 것 같다. 어른 세상이 궁금하듯, 반대의 세계가 궁금하다. 반대의 영역을 통과함으로써 세상이라는 암호를 푸는 데 하나의 열쇠를 쥐고 싶다. 세상을 알고 싶은 욕구,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매혹을 부추긴다.

한스가 보기에 하일너는 “자기 나름대로의 사고와 언어를 가지고” 있다. 한스가 주체성 없이 어른들 말을 추종한다면, 하일너는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능동적으로 삶을 설계하는 것 같다. 하일너는 닮고 싶은 우상이자 세상을 더 많이 아는 ‘앞선 사람’이다.

순진한 모범생은 종종 불량한 반항아에게 반한다. 갖은 풍파를 겪어서 세상을 두루 아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끌림 근저에는 세상에 대한 인식 욕구가 있다. 더 정직하게, 세상보다는 자기 고통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은 욕구다. 불안, 열등감, 고독 등 청소년 특유의 심적 고통에 대해 저 아이는 무언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토록 매력적인 반대의 자질은 한편 자기가 억압했던 그림자다. 한스는 출세욕, 승리욕, 성실함을 무럭무럭 키우면서 자기의 시인 기질을 억압했다. 자신 안에 예술가로서의 심성과 재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하일너에게 매혹되면서 동시에 시의 마력에 홀린다. 비록 감춰졌으나마 시인 기질이 한스에게 있었기에 홀림이 가능했다. 한스는 하일너 덕분에 자아를 재발견한 것이다.

자전적인 이 소설에서 한스는 헤세의 분신이다. 작가의 실제 삶에 비추어 소설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고쳐본다. 한스는 몰랐던 자신의 예술가 기질을 발견한 뒤 재능을 계발해 위대한 시인이 된다. 현실에서 충분히 가능하다. 많은 청소년이 치명적인 우정을 계기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해 더 정확하게 미래를 설계한다. 이때 친구는 숨겨진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개천이라야 용이 난다

학교에서 쫓겨난 한스는 심각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아버지는 실망한 나머지 은근히 냉대하며, 아들이 기계공이 되기를 바란다. 한스는 전락을 참을 수 없었고, 결국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은 그의 마지막 심경을 “더럽혀지고, 모욕을 당한 듯한 느낌”이라고 기록한다.

한스가 이토록 자괴감에 신음한 이유는 남달랐던 우월감 때문이다. 신학교 입학 전 한스는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가게의 평범한 견습생을 경멸했고, 고작 그런 삶을 살까봐 두려워했다. 우월감에 푹 젖었던 한스를 비난할 수 없다. 우월감을 조장한 것은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자기 이상을 한스에게 투사해 지극히 높은 기준을 이식했고, 평범한 삶을 ‘견딜 수 없는 수치’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어떤 아이는 1등을 놓쳤다고 자살하고, 어떤 아이는 5등이어서 행복하다. 행복은 객관적 상황과 무관하다. 행불행은 내면의 기준에 따라 결정된다. 기준이 높으면 행복해지기가 어렵다. 우울증은 대부분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괴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그 기준이 어처구니없게 공허하다. 타인에 의해, 특히 부모가 주입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기대가 높으면 아이는 작아진다. 부모의 과잉 기대는 단순히 학교 성적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방면에서 교묘하고 섬세하게 아이의 자기 비하를 유발한다. 부주의한 부모는 상상을 초월한 국면에서까지 헛된 이상을 심어준다. 부모도 사람인지라 자식을 두고 꿈꾸는 일, 자기 꿈을 투사하는 일을 그만두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진의 아버지는 자식의 탁월한 도덕성을 꿈꿨다. 친구에게 얻어맞고 우는 진을 나무라면서 친구를 사랑으로 감싸라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진이 유쾌한 언변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며 어디서든 리더가 되기를 꿈꿨다. 내성적인 진은 활달한 척 연기해보았지만 힘에 부쳤고, 인기 없다는 자괴감만을 느꼈다.

높은 기준은 좌절을 유발

아버지는 우수한 성적이 아니라 독특한 천재를 꿈꿨다. 고교 때 4개 국어에 능통하거나 과학적으로 획기적인 발명을 하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책을 쓰는 자식을 꿈꿨다. 공상가 아버지로부터 공허한 이상을 주입받은 진은 매사 자신의 도덕성, 사회성, 지성을 점검했고 기대에 못 미친다고 판단해 자기 비하에 시달렸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거니와 어쩌면 개천이라야 용이 난다. 거대한 부모는 자식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심어주기 쉽다. 외모, 성격, 도덕성, 사회성, 지성 모든 면에서 높은 기준은 좌절을 유발한다. 작은 성취에도 감격하는 부모, 이만하면 됐다고 다독여주는 부모를 둔 아이는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이건 부모만의 숙제가 아니다. 진의 아버지는 사실 예의 탁월함을 꿈만 꿨을 뿐, 강요한 적이 없었다. 단지 호기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그것을 부주의하게 누설했을 따름이다. 아버지가 오로지 탁월함을 간절하게 원한다는 것은 진의 오해였다. 이처럼 ‘기준’은 타인에 의해 주입될 뿐만 아니라 오인으로 부풀려지기도 한다.

자기만의 기준을 세워야

청소년도 성찰해야 한다.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기준이 스스로 만든 것인가, 이식된 것인가, 오인으로 왜곡된 것인가. 어른들이 뭐라 해도 과감히 무시하고 자기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은 청소년의 과제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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