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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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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게 죄책감을 심어주었나

전상국의 ‘암코양이의 식성’과 ‘침묵의 눈’ 속 불행을 찾아다닌

가짜 죄인들의 난투극
등록 2018-10-06 18:48 수정 2020-05-03 04:29

혁은 사랑하는 이와 결혼을 앞두고 ‘그 짓’을 시작했다. 결혼 후 벌어질 불행한 사건들을 상세히 묘사해 연인에게 연달아 전자우편을 보냈고,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비난을 가득 적어 연인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결별을 스스로 유도한 셈이다. 결혼은 파탄 났다. 실은 유사한 일을 이전에 몇 번 반복했다.

영은 남자친구를 끊임없이 구박한다. 사소한 일을 빌미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면서 싸움을 건다. 약속을 잡고서는 일부러 나가지 않고, 다른 남자를 사귀는 듯 연기하기도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행복을 두려워하다</font></font>

혁은 실상 간절하게 결혼을 원하면서도 결혼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친다. 스스로 행복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는 자학이나 다름없다. 전상국 소설 ‘암코양이의 식성’의 준수도 자학에 중독된 인물이다.

준수는 서울에서 번듯한 직업을 버리고 일부러 시골에서 하찮은 직업을 구한다. “집안이 좋고 교양이 있고 그림이 괜찮은 여자”를 만나면 심히 불안하다. 하여 작부들만 만나거나, 작부가 아니라도 못난 여자를 만나야 편안하다. 그는 제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돈을 주면서 아이를 떼라고 잔인하게 말한다. 본심으로는 여자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그는 진심과 반대로 행동한다.

준수는 “고귀하다고 남들이 느끼는” 것, “완전하고 커다란 것, 깨끗하고 성스럽다는 것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 다닌다. “집안이 좋고 교양이 있고 그림이 괜찮은 여자”와 “애기”가 암시하는 행복한 가정, 서울의 좋은 직장은 보통 좋고 귀한 것, 즉 행복으로 여겨진다.

그는 행복을 두려워하며, 불행을 강박적으로 찾아다닌다. 이는 자학 또는 자기 처벌의 사례다. 이 근원에는 죄책감이 놓여 있기 쉽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죄책감은 기본적으로 자기 처벌 욕구로 나타난다. 은닉된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죄인이기에 행복해지면 안 된다고 암시를 건다. 앞서 혁은 심각하게 아버지를 미워했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아버지는 혁을 늘 비난했다. 혁은 저도 모르게 그 비난을 내면화해 자신이 죄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 행복이 다가올 때마다, 혁은 죄인인 자신이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어떤 청년은 좋은 제안을 받을 때마다 갖은 핑계를 대서 기회를 놓치며, 유력 인사와 가까워질 기회를 애써 피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프러포즈를 매몰차게 거절한다. 행복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자학은 중독적이라, 그 순환 고리에서 빠져나오기는 지구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 힘들다. 자신이 행복해지면 안 된다는 자기 처벌의 당위가 자학을 부추긴다. 그 이면에는 은닉된 죄책감이 있을 수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자학적 행동을 그만둘 수 없을 때</font></font>

죄책감은 자학뿐만 아니라 가학으로도 나타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학과 가학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죄책감은 먼저 자학으로 표출되지만 자학은 쉽사리 가학으로 둔갑한다. 자기를 처벌하는 대신, 타인에게 죄를 투사해 그를 처벌하는 것이다.

전상국의 소설 ‘침묵의 눈’에서 형이 어릴 적에 어머니가 성폭행당했고 화재로 죽었다. 대학생이 된 형은 시국 사건으로 취조당하다 동료들을 배신했다. 형은 이 두 사건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죄책감을 느끼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죄를 묻지 않고 타인의 죄로 돌린다.

어머니가 화재로 죽은 날 형은 “그 새끼”의 환상을 보았다. “그 새끼”가 불을 지르고 어머니를 죽였다고 상상했다. 성인이 된 형은 시도 때도 없이 거리의 불특정 다수 중 하나를 “그 새끼”로 지목하며, 주먹을 날리고 침을 뱉는다. “그 새끼”는 형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처벌받는 상상 속의 인물이다. 형은 죄책감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타인에게 죄를 전가하고 그를 처벌한다.

죄책감은 가학으로 발현된다. “그 새끼” 중 백치는 형에게 물고문에 전기고문까지 당한다. 형은 백치를 취조하면서 그를 간첩, 방화범, 살인범이라고 몰아간다. 이 죄목은 무의식 속에 형이 자기 죄라고 여기는 것들이다. 형은 백치에게 자기 죄를 투사하면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꿈꾼다.

남에게 죄를 돌리고 그를 괴롭히거나 자신을 처벌하거나 폭력적이긴 마찬가지다. 더 폭력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청년은 죄책감을 환기하는 대상, 즉 피해자를 박해하고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피해자에게 이중으로 가해하는 셈이다.

피해자를 보면 죄책감 때문에 괴로우니까 그를 더 미워한다. 한마디로 미안하니까 더 못되게 구는 것이다. 부모나 친구에게 가혹한 청소년의 마음속에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수 있다.

자학이나 가학처럼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는 나쁜 죄책감은 치유해야 한다. 원치 않는 자학적 행동을 그만둘 수 없을 때, 가까운 사람을 본의 아니게 괴롭힐 때 자문할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숨겨진 죄책감이 있는가? 어떤 목소리가 내게 죄책감을 심어주었나? 문제의 원인을 통찰하기만 해도 반은 치유한 셈이다. 다음으로 죄책감의 허구성을 깨달아야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죄 없이도 죄책감이 생긴다</font></font>

죄책감은 정말로 지은 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침묵의 눈’에서 어머니가 화재로 죽었을 때, 형은 자신이 불을 질렀다고 착각하면서 무의식 속에 자신을 방화범·살인범이라고 여긴다. 그는 시국 사건으로 취조받으면서 “너 간첩이지”라고 단죄당했다. 이후 저도 모르게 스스로를 간첩이라고 여긴다.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 방화와 살인은 상상한 죄고, 간첩죄는 남에게 주입받은 죄다.

어떤 청소년은 부모의 이혼이 제 탓이라며 죄책감을 느낀다. 상상 속에서 죄를 만든 것이다. 앞서 혁은 아버지에게 반복적으로 비난받으면서 죄책감을 형성했다. 남에게 주입당한 죄로 죄책감을 키우는 경우다. 이렇게 죄 없이도 죄책감이 생긴다.

‘암코양이의 식성’에서 준수의 죄책감도 죄 없이 생겼다. 데모 직후 준수는 깡패 서넛에게 잡혀 골목으로 끌려갔고, 깡패들은 준수의 등에 송곳을 무수히 꽂았다. 충격적인 처벌을 당한 사람은 처벌의 정당성을 고민하기 전에 자동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기 쉽다. 과거에 과도하게 또 억울하게 받은 비난은 나쁜 죄책감의 주범이다. 가령 왕따당하며 집단적 비난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비난의 목소리는 나쁜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네 잘못이 아니야</font></font>

많은 죄책감이 죄 없이, 어처구니없게 생성된다. 나를 꾸짖는 목소리는 때로 허구거나 가짜다. 나를 꾸짖는 목소리는 주체적으로 만든 순수한 윤리 기준이 아니다. 거기에는 외부자의 영향력이 개입한다. 가령 과거에 나를 왕따시킨 친구들이나 과하게 비난했던 타인들이 목소리를 오염시킨다.

이때 청년이 목소리의 허구성을 통찰하고 외부자의 가짜 영향력을 죽이면 죄책감의 폭력성을 완화할 수 있다. 과거 억울하게 나를 비난했고 현재도 과하게 꾸짖는 목소리를 극복해야 한다. 나를 혼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긍휼하게 어여삐 여기는 목소리로, 목소리의 성격을 착하게 바꾸자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서두의 영이 고등학생 때 남자친구가 사고로 죽었다. 그녀와 다툰 직후였다.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영은 행복해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재 연인을 구박하는 것은 가학이자 자학이다. 이런 친구를 만나면 꼭 전해주시길. 네 잘못이 아니야. 제발 자신을 용서하렴. 넌 아주 귀한 사람이야.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font size="2">*이 글은 필자의 논문 ‘전상국 소설에서 죄책감의 발현 양상’(, 2014)의 일부 아이디어를 토대로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혁의 사례는 카프카의 삶을 참조했다.(, 신해욱, 현대문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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