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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스승도… 죽여야 큰다

우상을 파괴하며 성장하는 소년, 박완서 단편소설 ‘배반의 여름’
등록 2019-04-11 12:21 수정 2020-05-03 04:29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먼 옛날 임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도자가 아니더라도, 성장하는 청소년에게 이 가르침은 소중하다. 성장은 끊임없는 죽임의 여정이다. 만나는 우상마다 파괴하고 죽여야 성장한다. 진리로 떠받드는 믿음, 무의식중에 나를 억압하는 목소리,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마음의 상처, 스스로 만든 감옥이 우상이다. 옛 나를 죽이고 새 나로 태어나는 것, 이 존재에서 저 존재로 건너가는 변환이 성장이다.

단편소설 ‘배반의 여름’에서 소년 ‘나’는 아버지를 숭배한다. 장대한 체구의 아버지는 “찬란한 금빛 단추가 필요 이상으로 여러 개 달”린 “비상식적이리만큼 화려한 옷”을 입고 출근한다. 이 화려한 옷은 아버지에 대한 매혹과 황홀을 부추긴다. ‘나’의 장래 희망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자신의 직장으로 데려간다. ‘내’가 발견한 현실은 충격적이다. 아버지는 큰 건물의 수위에 불과했고, 화려한 옷은 어릿광대 같은 수위 복장일 따름이었다. 황홀하도록 멋진 아버지라는 우상이 파괴된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새로운 우상을 섬긴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문필가, 명교수이자 고위층의 막후 인물인 전구라 선생이다. 그는 버림받고 약한 이웃에 대한 연민으로 유명하다. ‘나’는 그의 인격을 흠모하고 그의 이념을 정신적 지주 삼아 원대한 꿈을 키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전구라 사진을 보고 “딴따라보다도 못한 작자”라고 비난하더니 사연을 들려 준다.

성장은 ‘숭배→환멸→축적’의 과정

아버지는 위독하고 가난한 산모를 구하러 가면서 어렵게 택시를 잡았다. 전구라는 그 택시를 가로챘고, 사소한 몸싸움으로 아버지 친구를 고소했으며, 그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온갖 인맥을 동원했으나, 양담배를 피우다가 아버지에게 들켜서 그 사실을 덮는 대가로 고소를 취하했다는 것이다. 전구라에 대한 환상도 이렇게 깨진다.

아버지와 전구라에 대한 환상을 깨면서 소년은 성장한다. 두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우상에 불과했다. 성장은 끊임없이 우상을 부수는 여정이다.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이나 진리로 신봉하는 것은 언젠가 황홀한 외투를 벗어던진다. 애착했던 것의 맨몸을 보면서 소년은 환멸한다. 환멸은 성장의 다른 이름이다. 가야 할 길을 비추는 등불처럼 웅장한 존재가 형편없이 짜부라지는 광경을 목도하는 것이 성장이다.

소년이 우상을 부술 때마다 아버지는 낄낄낄 기분 나쁘게 웃는다. 아버지의 웃음소리는 고통스럽게 소년을 따라다닌다. 부숨에는 상처가 따른다. 완전한 줄 알았던 스승의 허점을 보는 일, 경전으로 여겼던 책의 이면을 보는 일, 진리라 믿었던 목소리의 허구를 보는 일은 참혹하다. 하나 그 참혹의 누적이 성장이다.

배움은 예전에 진리로 떠받들던 우상을 부수고 낯선 것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낯선 것은 대체로 불편하다. 어린 시절 처음 만난 5·18 광주의 진실은 불편했다. 국가권력이 도덕적이라는 믿음을 깨버렸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사랑의 남루한 본색을 이야기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은 불편했다. 어딘가에 완전한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도덕성이나 사랑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은 우상이었다. 불편한 것을 수용해야 배우고 성장한다. 그 순간은 고통스럽다. 어떤 배움은, 그것이 중요할수록 아프다.

‘마음 지배자’를 거슬러라

사랑하는 이는 곧잘 나를 지배한다. 나는 사랑하는 이가 나를 지배하도록 놔둔다. 사랑하고 믿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도 우상이다. 은연중에 자기를 조종하는 목소리가 있다. 청년은 저도 모르는 사이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의식하며 산다. 목소리의 주인은 부모, 학교 선배, 친구, 선생님일 수 있다. 판단하고 행동할 때마다, 자신을 반추할 때마다 목소리는 끼어들어서 논평하고 종종 꾸짖는다.

어릴 적 제 의견을 거침없이 말하는 데 익숙했던 한 아이가 그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 아이는 훗날 싫어도 싫다는 말을 못하는 청년으로 자란다. 그 아이의 내면을 지배하는 목소리는 과거 자신을 따돌렸던 친구들의 한마디다. “넌 너무 나대!” 아이는 충격적이던 그 목소리를 내면화해 늘 목소리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다. 이처럼 내면화된 타인의 논평이 우상 이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보이는 대학원생이 있다. 대학원생은 교수와 선배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풍문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사람과 가까워질 기회를 애써 피했다. 교수나 선배를 따로 찾아가지 않았고 단체 회식에서도 유력 인사를 피해 먼 자리에 앉곤 했다. 이런 행동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고, 그는 좋은 기회를 종종 놓쳤다.

그 청년을 무의식중에 지배하는 목소리가 있으니, 그건 아버지 목소리였다. “천박해!”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제 울분 때문에 세속적이고 약삭빠른 모든 행태를 천박하다고 비난했다. 청년은 그 비난을 내면화해 혹여 아버지에게 천박하다고 비난당할까봐 ‘약은 짓’을 극구 피했다. 그에게 아버지 목소리는 우상이다.

우리는 얼마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산다. 그런데 뚜렷한 실체가 아닌 상상 속 목소리의 비위를 맞추려고 할 때 문제는 오묘해진다. 앞서 청년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목소리는 실제와 다르다. 청년이 제 의견을 말한다고 어릴 적 친구가 비난하지 않을 것이며, 교수와 가깝게 지낸다고 아버지가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청년은 종종 자신을 꾸짖는 목소리를 상상하고 그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상상 속에서 나를 조종하고 억압하는 목소리가 우상이다. 이 우상을 파괴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성장이다.

배반은 ‘자유의 관문’이 될지니

내면에 웅크린 채 자기를 지배하는 상처가 있다. 그 상처는 쉬이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작동하면서 이상한 증상을 유발한다. 그 상처는 트라우마라고 한다. 트라우마로 생겨난 믿음 체계가 또한 우상이다. ‘배반의 여름’에서 ‘내’가 일곱 살 때 누이동생이 개천에 빠져 죽었다. ‘나’는 이후 “어느 물 밑에고 내 누이동생의 원혼이 있어 나를 잡아당겨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물가에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어느 날 ‘나’를 기습적으로 풀장에 빠뜨린다. 얼마간 허우적대다가 ‘나’는 발이 땅에 닿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윽고 ‘나’는 물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수영을 배운다. 누이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로 생긴 ‘물은 무섭다’는 믿음, 즉 우상을 죽임으로써 성장한 것이다. 트라우마로 인한 잘못된 믿음을 부수는 것이 성장이다.

사람들은 평생 유사한 행동을 반복한다. 그 유형 아래에는 극복되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게 마련이다. 어려서 가까운 사람에게 심하게 거부당했던 청년은 그 트라우마로 타인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타인을 믿지 못한다.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나르시시스트, 관계보다는 성공에만 골몰하는 성취 지향적 인간, 사랑에 깊이 빠지기 전에 서둘러 연인을 바꾸는 바람둥이 가운데 이런 회피성 성격이 많다. 그는 일생 동안 행동 유형을 바꾸기 어렵다. 그 유형 아래 잠복한 것은 ‘타인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굳건한 믿음이요, 그 믿음을 만든 것은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로 인한 잘못된 믿음은 마음의 감옥이다. 감옥이기에, 어지간해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탈출법은 오직 하나. 잘못된 믿음이 우상임을 아는 것이다. 그 옳음을 의심치 못했던 믿음이 헛된 우상이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행동 유형을 바꿀 수 있다. 소설에서 소년이 ‘물은 무섭다’는 굳은 믿음을 파괴하고서 공수병을 극복했듯, ‘타인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오랜 믿음을 죽여야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 성장은 우상 살해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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