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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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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라는 무대에 선 배우들

수만 가지 배역을 편력하는 젊은이의 연기 시절,

밀란 쿤데라의 <농담>
등록 2019-02-16 16:51 수정 2020-05-03 04:29

대학에 입학하자 환에게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환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정직하게 말해서 어떻게 해야 남들의 호감을 살지 알 수 없었다.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나 신경 쓰였다.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었다.

고민하던 그는 영화들을 섭렵하고 주인공들의 성격을 유심히 살폈다. 영화 주인공처럼 연기하기로 했으나, 배역 결정은 쉽지 않았다. 누구를 ‘따라해야 할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환은 술을 마실 때마다 한탄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의 솔직한 버전은 따로 있었다. 누구를 벤치마킹할 것인가?

환은 니힐리즘(허무주의)에 빠진 지식인, 기존 질서를 쉽사리 거역하는 반항아, 억압을 거부하는 보헤미안 역할을 두루 맡았다. 무슨 연기를 하더라도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치밀하게 계산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환은 안다. 이들이 제 진짜 모습이 아니라 단지 연기일 뿐이며, 때로는 진짜와 정반대임을. 불안하다. 누군가 비난할 것만 같다. 넌 진짜 모습을 감추고 타인을 속이고 있다고.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거다. 진짜 자기 모습을 환도 모른다는 것.

연기와 본색 사이

연기로 세상을 기만한다고 불안해하지 마시라. 원래 젊은이들에게 연기는 숙명이라고, 의 쿤데라는 말한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가령 단호하고 엄격하며 폭력으로 사람들을 곧잘 제압하는 젊은 중대장이 있다. 그는 실제 그런 성격이 아니라 강철 같은 완력을 가진 슈퍼맨 역할을 연기 중이다. 진짜 모습은 어린애 같은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 모방할 대상을 정하고 그를 따라 연기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는 ‘~척’ 전문가다. 예쁜 척, 착한 척, 똑똑한 척, 잘 노는 척, 튀는 척, 반항하는 척…. 그들은 자주 친구가 ‘~척’ 한다고 비난하지만 스스로 안다. 자신도 ‘~척’ 중임을. 젊은이의 행동은 종종 부자연스럽고 과장되며 우스꽝스럽다. 젊은이는 타인이 속아줄 거라고 믿으며 자기 아닌 모습을 연기한다. 내용을 모르는 채 누군가의 이미지만을 좇아 모방한다. 모방할 누군가를 찾아 편력을 거듭한다.

마음을 감추려 뒤집어쓴 가면

모방에 몰두하던 젊은이는 갑자기 뇐다. 이게 아닌데. 더 멋진 누군가가 있을 텐데. 그러면 이제 또 누구를 모방할 것인가? 이 질문은 젊은이의 각종 방황 아래 숨은 화두다. 그는 변덕스러운 구매자처럼 이 옷 저 옷 번갈아 바꾸어 입는다.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외투를 찾을 때까지. 그러다가 탄식한다.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닫기도 한다. 연기와 본색 사이의 분열로 인해 불안해진다. 서두의 환처럼,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인다고 죄책감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모습이 ‘자기’다. 연기가 쌓이면 진짜가 된다. 아니 진짜를 찾으려면 필히 각종 연기를 섭렵해야 한다.

젊은이가 흠뻑 빠져드는 배역은 자기의 진짜 모습과 정반대의 역할이다. 가령 친구들에게 늘 밥을 사주고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귀찮은 일을 도맡는 젊은이가 있다. 그는 이타성의 화신을 연기 중인데, 실은 어릴 적에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자주 들었다. 그것을 콤플렉스로 여긴 그는 자신의 이기적 면모를 감추기 위해 반대되는 역할 연기에 몰두한다.

의 루드비크는 나이 든 척, 모든 것과 거리를 두는 척,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척했다. 여자친구 마르케타에게 여자를 너무 많이 겪어서 흥미를 잃어버린 척했다. 그녀의 모든 의견을 조소했으며 오만하고 냉소적으로 굴었다. 실은 그녀에게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추려 뒤집어쓴 가면이었다. 그는 서정적이고 순진한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에 정반대의 모습을 연기했다.

진심과 반대로 자행한 연기는 엄청난 파국을 불러온다. 마르케타는 방학 중 당 교육 연수에 참여했고 연수에 더없이 만족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루드비크는 자신을 떠났는데도 행복한 그녀에게 너무나 섭섭했고, 아이처럼 상처받은 자신이 부끄러웠으며, 그 마음을 감추어야 했기에 그녀를 냉소하는 편지를 보낸다.

바로 이 편지로 인해 루드비크는 사상성을 의심받아 당에서 쫓겨나고 탄광촌의 군부대로 유배된다. 반동으로 해석된 문제의 냉소는 단지 상처받은 진심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루드비크 일생의 가장 참혹한 비극이 ‘반대로 연기’ 때문에 일어났다.

대단하다고 말해줘, 제발

젊은이의 연기는 자아정체성 불안에서 비롯된다. 젊은이는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무척 궁금하지만 도통 모른다. ‘자기다움’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만들어지는 중이다. 하여 젊은이는 ‘되고 싶은 자기’라고 상상되는 누군가를 모방한다.

연기의 다른 이유는 인정 욕구 때문이다. “누가 보아줘야 하고 들어줘야 하고 인정해줘야만 한다는 그 욕구”는 허다한 연기의 이면에 숨은 욕망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보다 더 다급하고 절실한 질문은 이렇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죽지 않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젊은이들이 정체성보다 더 애타게 찾는 것은 자존감이다. 그런데 자기 정체도 모르는 마당에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기가 쉬울 리 없다.

젊은이는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기가 대단히 어렵기에 그것을 타인의 인정에서 구한다. 살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승인받고 싶다. 하여 타인의 시선에 과하게 집착하고, 매력 있게 보이기 위해 혼신을 다해 연기한다. 개성 있는 옷차림, 튀는 행동, 재치 있는 말솜씨 등등 각종 멋진 배역을 연기하는 젊은이가 갈구하는 단 한마디는 이렇다. 넌 대단해!

불안, 자유와 관대의 다른 이름

자기에게 딱 맞고 편안한 가면을 찾기 이전, 무수한 자기를 전전하는 처지는 불안하다. 그래서 쿤데라는 젊은이의 연기 시절을 이렇게 비관한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를 신고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으로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다.”

과연 젊은이는 자신을 사로잡은 배역의 내용을 모르고, 본질 없는 연기에 몰두하느라 참혹한 결과를 빚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내용을 인지하고 숙고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그러기만 할까.

젊은이가 딱 맞는 자기 옷을 찾으면 그때부터 고착되고 완고해진다. 확고하게 결정된 자신 안에서 편안하기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사람이 나이 들수록 배타적으로 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안정한 연기에 몰두 중인 젊은이는 모든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다. 그는 변화무쌍하기에 자신과 다른 것을 자유롭게 수용한다. 이 자유로움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관용과 관대는 젊은이의 불안이 배후에 거느리는 찬란한 무지개다. 젊은이의 변덕은 위태롭지만 아름답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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