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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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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수많은 감옥이여

36살 여인을 사랑한 15살 소년의 갈등과 성장,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등록 2018-08-14 14:54 수정 2020-05-03 04:29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

병약한 15살 소년 미하엘은 36살의 한나와 사랑에 빠진다. 구토하는 미하엘을 한나가 돌봐주었고, 미하엘은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간다. 이때 한나가 스타킹을 신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습은 소년에게 타는 듯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소년은 욕망으로 열병을 앓다가 한나를 찾아간다. 한나가 그를 다정하게 타일러서 돌려보내리라 기대했다. 기대는 어긋난다. 한나는 그를 침대로 이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에서 소년의 첫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기묘하고 평화로운 관계

그 관계는 소년에게 놀라운 안정감을 선물한다. 그는 “힘이 넘치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꼈”으며, 자신감 덕분에 학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여자를 두려움 없이 침착하고 친근하게 대할 수 있었기에 소녀들의 환심을 산다. 가족과 거리를 둘 수 있었기에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던 형과 여동생을 포용하게 된다. 연인과 함께하면서, 소년은 가족과 작별한다.

관계는 기묘하게 평화롭다. 소년이 여인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고 내맡겼기 때문이다. 소년은 연인을 잃지 않으려고 복종하고 굴욕을 감내한다. 여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면 소년은 잘못이 없어도 잘못했다 말하고 다시 사랑해달라고 애원한다. 연인 앞에서 자기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다. 굳건한 두 자아는 격돌하기 쉽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면 관계는 역설적으로 공고해진다. 이런 완전한 내맡김은 지극히 순진무구한 사랑에서나 가능하다. 이기심과 자기주장을 모조리 포기해도 억울하지 않고, 상대를 군주처럼 섬기기만 해도 흡족했던 사랑. 우리는 그것을 첫사랑이라 기억한다. 그런 바보 같은 사랑은 두 번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나는 떠났다. 이별 이후 미하엘은 오만방자해진다. “상실의 아픔을 가져올 만큼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동급생 소피를 유혹해서 하룻밤을 보낸 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일부러 상처를 입힌 것이다. 미하엘은 “굴욕을 당하거나 굴종을 인내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한다. 사랑했기 때문에 굴종했으나 그럼에도 상처만 받았으니 굴종이라면 치가 떨린다. 그는 온몸에 날을 세우고, 주변 사람들을 찌르면서 자신을 보호한다. 진심으로 충고하는 선생님을 공박하고, 죽어가면서 그를 축복하는 할아버지를 면박 준다.

청년은 종종 매정하고 쌀쌀맞다. 특히 사랑 앞에서 그렇다. 치명적이었던 사랑을 잃은 청년은 이후 사랑에 빠져도 그것을 부정하고 깊게 빠지지 않으려고 기를 쓴다. 관계에 연연하지 않음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이성에게 눈길을 돌린다. 관심 있는 사람이 다가와도 냉정을 가장한다. 누군가를 믿고 의존하는 일이 두렵기 때문이다. 기대한 만큼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워지기에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믿고 싶어지면 그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차마 매도할 수 없는 악이 있다는 것

어떤 청소년은 고슴도치 같다. 조롱, 공박, 비아냥, 폭력 등 각종 기술을 휘둘러서 모든 사람을 공격한다. 공격적인 청소년의 마음속에는 이런 원망이 있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지!’ 과거 누군가에게 모질게 대접받았기에, 다시는 다치지 않기 위해 날을 바짝 세우고 자신을 과잉보호한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상처받았으므로, 더 상처받지 않으려고 모두를 밀어낸다. 미하엘은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면서도 “애정이 담긴 조그만 제스처에도 목이 메”었다. 못된 망아지 같은 청소년의 마음속엔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우는 어린아이가 있다.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한나를 법정에서 재회한다. 한나는 나치 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일한 경력 때문에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정에 선 다른 감시원들은 한나를 범죄의 주동자로 몰아가며 그 근거로 어떤 보고서를 한나가 썼다고 주장한다. 한나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보고서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나는 보고서를 썼다고 거짓으로 인정한 대가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한나는 문맹임을 들키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재판정에서 한나를 보기 전, 대학생 미하엘은 부모 세대를 도도하게 비난했다. 부모 세대는 나치 범죄를 저질렀거나 수수방관했다. 아니면 나치에 동조한 사람들이 주변에 살도록 묵인했다. 미하엘은 끔찍한 강제수용소 사건들을 고발했으며, 부모 세대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미하엘과 친구들은 아우슈비츠라는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후손이라는 수치심을, 부모 세대를 비난함으로써 극복하려 한 것이다.

재판 이후 미하엘은 “그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범죄자 한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나를 비난해야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차마 매도할 수 없는 악이 있음을 알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이 짐작만큼 순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미하엘은 법정에서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증언함으로써 그녀를 구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한나와 다시 얽히거나 그 관계가 세상에 알려질까봐 두려웠다. 자신이 이토록 비겁하고 누추한 인간임을 자각한 이,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한 이가 자신만만하게 세계의 악을 고발하기는 어렵다.

완전함에 작별 인사를

청년은 매의 눈으로 기성세대에게서 부조리와 부정의를 예리하게 발견하고 고발한다. 그는 의기양양한 판사나 다름없다. 그 앞에서 무죄로 방면되는 성인은 많지 않다. 기성세대가 늘 못마땅한 이유는 청년이 완전함을 믿기 때문이다. 미하엘은 완전한 선과 완전한 정의의 가능성을 믿고, 지극히 사소한 불순물도 악으로 치부한다. 완전함을 신봉하는 그의 기준에 기성세대는 늘 미달했기에 그는 부모를, 스승을, 어른들을 역겨워한다.

어느 순간 청년은 세상이 그렇게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선인 줄 알았던 것의 이면을 보고 악인 줄 알았던 것의 가여움을 본다. 완전했던 선악의 기준에 금이 간다. 무엇보다 완전히 염결한 줄 알았던 자아상이 갈기갈기 찢긴다. 자기의 크고 작은 오점을 정직하게 인식한 청년은 망설임 없이 세상의 악을 비난할 수 없다. 세계에 대한 비난이 “의기양양한 독선”에 불과하지 않을까 자문하는 순간 그는 성인이 된다.

완전함에의 꿈은 자신에게도 향한다. 완전함을 꿈꾸기에 청년은 자주 아프다. 미하엘은 고교 시절 “언젠가는 멋지고 영리하고 남보다 우월한 경탄의 대상이 되리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어린 청소년은 앞으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낙관한다.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은 기본이다. 탁월한 능력으로 많은 사람의 인정을 받고 이름을 떨치며 자신에게 모든 것을 베푸는 연인을 만나리라 믿는다. 서른 즈음 그는 10년 전 그렸던 자아상에 비해 턱없이 초라한 자기를 발견한다. 라는 노래가 고전이 된 사실이 보여주듯, 서른 즈음의 우울증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절망은 어린 시절 꿈의 크기에 비례해 커진다. 우울은 완전함을 향했던 믿음의 크기만큼 깊어진다.

이때 완전함에의 믿음을 깨야만 회복할 수 있다. 완전함을 지속적으로 꿈꾸는 청년은 못난 자신을 견딜 수 없어서 병든다. 그러니 모자라고 미흡한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어릴 적 꿈에 못 미치지만 여전히 괜찮은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한나는 문맹임이 부끄러워서 차라리 종신형을 택했다. 미하엘은 한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여러 번 배반했다. 재판에서 한나가 문맹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고, 그녀가 죽기 전까지 관계를 부인했다. 21살 연상의 여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수치심 때문에 한나는 제 인생을 망쳤고 미하엘은 사랑하는 사람을 나락으로 밀어넣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러야 할 정도로, 수치심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수치심은 그들을 평생 구속한 감옥이었다.

수치심은 죄책감이라는 다른 감옥을 만든다. 미하엘은 결국 한나에게 자기 “인생의 어떤 자리도 내주지 않았”기에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이혼했고, 평생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었다. 여자를 만날 때마다 한나와 비교했으며 이게 아니라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죄책감 때문에 다른 여자와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를 처벌하려고 평생 행복으로부터 도망 다녔다.

얼마나 많은 감옥을 부숴야 어른이 될까

청년은 마음속에 감옥을 여러 채 짓는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고, 평생 자신을 지배하는 형태가 마음의 감옥이다. 수치심과 죄책감 말고도 감옥은 다종다양하다. 사랑도 미움도 열정도 신념도 감옥이다.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자기 감옥의 수인으로 살아간다. 진정한 성장은, 끝내 부수지 못할 것 같던 마음의 감옥을 부술 때 이루어진다.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하여 누군가가 마음의 감옥을 부수는 장면은 아름답고 감동스럽다.

한나는 글을 배운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수치심이라는 오랜 굴레를 벗는다. 한나의 죽음 이후 미하엘은 낯선 작가에게 한나와의 관계를 공표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쓰겠다고 결심한다. 비로소 수치심과 죄책감이라는 묵은 족쇄를 끊어버린 것이다.

얼마나 많은 감옥을 부수어야 어른이 될까. 그 지난한 부숨의 여정에 동반하려고 연재를 시작한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박수현의 청춘지심’ 연재를 시작합니다. 소설에 나타난 청(소)년의 심리를 읽고 청(소)년의 정신적 성장과 마음 치유를 도우려 합니다. 모두가 청(소)년기를 겪기에 모든 독자가 공감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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