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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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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행하면 안 돼?

자명한 상식을 의심하는 청소년의 심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록 2019-01-19 17:25 수정 2020-05-03 04:29
<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펴냄

<지하로부터의 수기>, 민음사 펴냄

선의 손목은 자해 흉터로 울퉁불퉁하다. 공부를 꽤 잘했던 선은 더 이상 공부하지 않는다. 이따금 학교에 가지 않고 며칠씩 사라진다. 자살할 자리를 찾아 떠난단다. 온순했던 선은 예전과 달리 엄마에게 자주 대든다. 엄마는 울부짖는다. 도대체 왜 그러니. 실은 선이 더 궁금하다. 내가 왜 이럴까. 우울증이라는 정신과 의사의 진단은 많은 것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왕따와 학업 스트레스를 의심한다. 선은 왕따당한 적 없고, 학업 스트레스를 느끼기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뭔가 더 근본적이고 섬세한 원인이 있는데, 선은 그 정체를 모른다. 그러던 선, 옛날 소설 의 지하 인간에게서 자기와 닮은 한 면을 본다. 아직 제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가슴 한구석 엉켰던 실타래가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2×2=4는 뻔뻔스러움의 극치”

지하 인간은 “자신의 정상적인 이득과 정반대로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는” 일에 중독된다.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것, “이성과 명예와 평온과 안락” 등 제게 이로운 것이 뭔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그 반대를 택한다. 고집스럽게 어리석고 해로운 일을 자청한다.

일례로 그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굴욕에 빠뜨리”는 데 골몰한다. 과거 견원지간이었던 친구의 환송연이 열리는데, 친구들은 지하 인간에게 참석하지 말라고 눈치를 준다. 그는 무시당할 것을 알면서도 극구 참석하며, 일부러 성깔을 부려서 분위기를 망친다. 친구들은 대놓고 그를 따돌린 채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한다. 그래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친구들 옆을 서성인다.

명예를 원했더라면 그 자리에 가지 않아야 했고, 우정을 바랐더라면 호감을 사게 굴어야 했다. 그는 명예를 추구하면서도 모욕이 예견된 자리에 갔고, 우정을 꿈꾸면서도 미움받게 행동했다. 안락, 행복, 긍정적이고 정상적인 것을 근본적으로 회의하기 때문에 일부러 청개구리처럼 처신했던 것이다. 이런 행태는 단순히 한 인간의 분열적 성격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의 어떤 행동 방식과도 유사하다.

청소년은 이따금 행복과 안락으로 인도한다고 알려진 길에서 제 발로 나가버린다. 공부를 잘하던 아이가 공부를 포기하고, 부모에게 순종하던 아이가 엇나간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착한 아이 노릇 등 이롭다고 알려진 것과 반대의 것을 추구한다. 좋다고 알려진 모든 것이 정말 좋은가, 총체적으로 회의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몸에 각인된 상식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의심한다. 공부는 왜 하는가?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사랑받아야 하는가? 좋은 대학과 안정된 직장이 과연 행복을 보장하는가? 행복이 좋은 것인가? 불행하면 왜 안 되는가? 좋은 게 과연 좋은가?

신참자는 이제 갓 발을 들여놓은 세계의 룰에 무조건 찬동할 수는 없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상식을 꼬나본다. 2×2=4라는 자명한 상식도 의심한다. “2×2=4는 내 생각으론 정말로 뻔뻔스러움의 극치일 따름”이며, “2×2=5도 이따금씩은 정말 귀여운 녀석”이라는 지하 인간의 독백처럼, 청소년은 상식을 뒤집는 자리에 뭔가 근본적으로 위대한 해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청소년은 지금껏 당연한 의무인 줄 알고 익숙하게 해왔던 일의 가치를 갑자기 의심하면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자기만의 이유, 즉 의미를 찾고 싶다. 그런데 간절히 의미를 찾는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온통 암흑이다. 자기를 생생하게 점화할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다. 공허하다. 아노미 혹은 카오스가 밀려온다.

무의미에 질린 청소년은 고통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공연히 술을 마시고 싸움을 걸며 얻어맞고 손목을 그으며, 자신을 해치는 일에 전념한다. 쓸모없고 해로운 일에 몰두할 권리를 관철하고, 금지된 일을 자행하는 쾌감을 즐기고 싶다.

지하 인간이 굴욕적인 상황을 자발적으로 일으키는 이유는 모욕감, 즉 고통 속에서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권태 탓”으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지겨웠기 때문”이란다. 좋다고 알려진 모든 것이 무의미해 견딜 수 없기에, 그는 오로지 고통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구한다.

“모든 이가 나를 무시하고 경멸한다”는 믿음

지하 인간이 느끼기에, 모든 사람은 “역겨움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인 아폴론이 자신을 깔보며, 자기에게 호의적인 여인도 자신을 경멸한다고 믿는다. 실은 그가 정말로 미움받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진 것이다.

그가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이다. 몽상 속에서 그는 저명한 시인이 되어 어마어마한 기금을 받으며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월계관을 쓰고 백마에 올라탄 듯한 기세로 세상으로 나아”가 누구 앞에서나 뽐내고 누구에게나 매력을 인정받는다. “조연을 맡는 건 나로선 납득할 수 없”다.

현실은 그 반대다. 그의 일상은 자존심 상하는 일투성이다. 영웅이 못 되었다는 이유로 그는 무참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는 자신에 대한 치명적인 불만을 느끼고 그 불만을 남에게 투사한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남들이 자신을 바라본다고 여긴다. 자기가 자기를 극도로 경멸하는 만큼, 모든 사람도 그렇다고 믿는다.

어떤 청소년은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무시당한다고 굳게 믿는다. 누구보다 부모가 자신을 경멸한다고 믿는다. 폭력을 휘두른 청소년이 가장 자주 밝히는 폭력의 사유는 이렇다. 나를 무시하잖아. 무시당한다는 믿음의 이면에는 치명적인 자기 비하가 있다. 자신을 극도로 하찮게 보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남에게 투사해 남도 자기를 무시한다고 믿는다.

청소년의 자기 비하는 지하 인간의 경우처럼 자신에 대한 높은 이상 때문에 생겨나기도 하지만, 자아정체성 불안으로도 생긴다. 청소년은 자기에 대한 안정적인 인식을 가지기 어렵다. 컨디션에 따라 어떤 날은 자기 우상화에, 어떤 날은 자기 비하에 빠져든다. 청소년의 자기 평가는 극에서 극으로 정신없이 오락가락한다. 지하 인간처럼 “영웅 아니면 진흙탕, 중간이란 없”다.

흐린 날 청소년은 비합리적인 이유로 매사 자기를 비하한다. 세계는 그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로 가득한 지뢰밭이다. 사소하게 말실수했다고, 그 애 앞에서 얼굴을 붉혔다고, 노래 부를 때 박자를 못 맞추었다고, 수학 문제 답을 1분 늦게 알아차렸다고, 남들이 다 아는 소문을 모른다고…. 눈 뜨고 나서 만나는 모든 일을 자기의 못남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는다.

빈번하게 자기 비하에 시달리는 청소년은 자신이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 믿음은 자신이나 남을 해친다. 그 믿음이 속으로 파고들면 우울증이나 자해로 발전하고, 바깥으로 향하면 폭력으로 분출된다. 자신에 대한 분노를 남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찢어진 마음 위로하려 권력 행사하기도

지하 인간도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남한테 투사한다. 환송연에서 모욕을 당하자, 창녀 리자를 찾아가 리자의 비참할 앞날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리자를 염려하는 척 가장했지만, 실은 비탄에 빠뜨리기 위해 교묘히 계산된 행위였다. 그의 의도대로 리자는 참혹한 절망에 빠진다. 그는 리자의 눈물과 굴욕을 쟁취함으로써 권력을 확인하고, 자신을 위안한다.

청소년은 더러 누군가에게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자기 비하로 찢어진 마음을 위로하려고 한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거나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이성 친구를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 타인을 제 뜻대로 움직이면서 권력을 확인하고 자기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박수현 문학평론가·공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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