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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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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포위한 ‘신탁’ 깃발들

1947년 중앙청에 내걸린 미·소·영·중 국기

신탁통치 참여해 한국 운명 틀어쥔 국가들 
등록 2018-05-03 05:59 수정 2020-05-03 04:28
❶ 보스턴마라톤대회의 챔피언 서윤복 선수를 축하하기위해 중앙청 앞에서 열린 환영식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1947년 6월23일 W. 워네키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❶ 보스턴마라톤대회의 챔피언 서윤복 선수를 축하하기위해 중앙청 앞에서 열린 환영식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1947년 6월23일 W. 워네키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1947년 6월23일 엄청난 인파가 중앙청 앞을 메웠다. 4월19일 미국에서 열린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한 서윤복 선수, 남승룡 코치 겸 선수, 손기정 감독을 환영하기 위해 모였다. 서윤복의 우승은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세운 세계신기록을 한국인이 다시 세운 대사건이었다. 남승룡도 한국인 최초의 동메달리스트였으니, 가히 위대한 마라토너들을 축하하는 자리였고, 그에 걸맞은 환영 인파였다.

김구가 서윤복에 써준 ‘족패천하’
❷한국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직화된 시위에서 수천 명이 고함을 지르며 한국 정치지도자들이 연설하는 서울운동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1945년 12월31일 웹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❷한국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조직화된 시위에서 수천 명이 고함을 지르며 한국 정치지도자들이 연설하는 서울운동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1945년 12월31일 웹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당시 촬영한 영상을 보면, 열광적인 환영 분위기가 느껴진다. 인천항으로 배가 들어오는 장면부터 자동차 행렬을 하며 남대문을 거쳐 중앙청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 인파의 만세와 태극기 물결이 넘실댔다. 영상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사령관 존 R. 하지 중장과 미군정 관계 인사들이 선수단 일행을 환영하는 모습이 나온다. 좌우합작 운동의 상징이자 ‘중간파’ 정치지도자인 여운형과 김규식의 모습도 포착됐다. 영상에는 없지만, 이승만과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 김구가 서윤복에게 ‘족패천하’(발로 천하를 제패하다)라는 휘호를 써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군 사진병이 찍은 사진❶은 이런 분위기를 역사의 한 장면으로 포착했다. 인파만큼이나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중앙청 전면이다. 당시 한국 상황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을까. 아직 ‘우리’ 국가와 정부를 세우지 못했지만, 민족-국가 수립 운동의 상징이던 태극기가 중앙에 걸리고, 양옆에 4대 열강인 미국·소련·영국·중국 국기가 걸려 있다. 바로 한국의 운명을 틀어쥔, 한국 ‘신탁통치’에 참여하는 국가들이다.

신탁통치란 무엇인가? 특정 ‘종속’ 지역이 자치 능력을 갖춰 ‘독립’할 때까지 유엔(국제공동체)의 ‘신탁’(믿고 맡김)을 받은 관리기구(특정 지역에 이해관계를 갖는 국가연합)가 유엔 총회와 신탁통치이사회의 감독 아래 그 지역을 임시 관리, 통치하는 것이다. 열강들의 무분별한 영토 병합과 주권 박탈을 통한 식민지배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열강들의 식민지 확장으로 세계전쟁이 발생하는 일과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가 있었고, 이것이 종속 지역의 국제 신탁통치 구상으로 이어져 유엔헌장에 들어갔다. 문제는 종속 지역의 즉각 독립이 아니라 긴 ‘수습 기간’을 거쳐 준비한 뒤 때가 되었을 때 독립한다는 데 있었다.

한국은 적국 일본의 식민지로 신탁통치 대상 지역이었다. 1943년 이집트 카이로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지만, 그 실상은 점령→신탁통치→독립 경로를 거치는 것이었다. 1945년 9월 미국과 소련의 한국 분할 점령이 진행된 뒤 한국 문제 처리의 구체적인 방법은 1945년 12월 미국·소련·영국 외상이 모이는 모스크바에서 결정됐다. 12월28일 오후 6시(한국시각 기준)에 공식 발표된 그 유명한 ‘한국에 관한 결정’이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이 결정을 다음날인 29일 오후 미국 워싱턴으로부터 공식 통보받았다.

결정 내용은 우선 ‘한국민주주의임시정부’(이하 한국임시정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일제 독립운동 시기 중경임시정부는 ‘임정’이라 표기함)를 수립하고, 미소 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한국임시정부와 협의한 뒤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미·소·영·중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카이로회담에서 결의한 “적절한 절차를 거쳐”의 구체적 방법을 세운 것이다. 원래 미국의 제안은 4개국이 행정·입법·사법 기능을 독점한 시정권 기구를 수립해 한국인들을 최대 ‘5+5년’(5년 기한으로 하되 5년 연장 가능) 신탁통치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한국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한 뒤 신탁통치 프로세스로 가자는 역제안을 했고, 미국도 이를 받아들여 최종 결정했다.

오보와 신탁통치
❸거리시위 뒤 한국인들은 연합군이 5년 동안 신탁통치하는 결정에 저항해 서울운동장에 모여 연설을 기다리고 있다. 1945년 12월31일 패트리지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❸거리시위 뒤 한국인들은 연합군이 5년 동안 신탁통치하는 결정에 저항해 서울운동장에 모여 연설을 기다리고 있다. 1945년 12월31일 패트리지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탁통치 기간을 5년 이내로 결정한 것도 소련의 제안이었다. 누가 좋고 나쁘다는 ‘가치’ 판단이 아니라 실증적 ‘사실’이 그러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셈법에 충실했을 뿐이다. 정용욱의 말을 빌리면, “미국은 비정치적이고 행정 실무상 문제를 우선시하면서 국제적 해결 방식을 주장해 자신의 주도권과 우세를 보장받으려 했지만, 소련은 해방 이후 한국 정세나 좌우 세력 관계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보다 본질적으로 정부 수립 문제를 제기해 주도권을 관철시키려” 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미소의 공중전이 별거 아닌 것으로 느껴질 만큼 한국 현지에서의 지상전은 더 격렬하게 전개됐다. 남북으로 분할 점령된 한국을 좌우로 분단시키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오보 사건과 이 때문에 전개되는 일련의 ‘신탁통치 파동’이다. 모스크바에서 최종 결정이 공식 발표되기 전날이던 12월27일, 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는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이 왜곡 보도의 전말에 대해서는 꽤 진지한 연구가 있고, 추리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여기에 내가 보탤 말이 더 있을까. 다만 나는 이것을 계기로 전개되는 ‘반탁’ 운동과 그 직후 ‘찬탁’과의 적대적 대결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미군 사진병의 시각과 사각(보이지 않는 곳) 속에서 확인하려 한다.

사진으로 봐도 12월31일은 29일의 ‘작은 소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반탁시위가 크게 고조된 날이었다. 29일 밤에서 30일 새벽에 김구의 경교장(한국임시정부 청사)에서 반탁을 규합하는 회의가 있었고, 이때 신중론을 폈던 한국민주당(한민당) 정치지도자 송진우가 그날 새벽 자택에서 암살당할 정도로 반탁 열기가 폭발적으로 분출하고 있었다. 사진❸을 보면 눈 내린 운동장에 모든 시위자가 “신탁통치 절대 반대” 펼침막을 들고 서 있다.

이 시위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날 김구와 임정 출신 인사들은 전국총파업을 결의하고 정권 접수를 선언했다.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군정과 경찰 등 한국인 직원은 모두 임정 지휘 아래에 있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이를 쿠데타로 규정하고 대응에 나섰다. 하지 중장은 “자살하겠다고 날뛰는 김구를 진정시키고, 반탁시위가 군정이 아닌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것임을 밝히라고 설득했다.” 하지 중장이 “나를 속이면 죽여버리겠다”고 김구를 위협했다니 그냥 설득은 아닌 셈이다. 임정의 기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미군정과 임정은 서로 체면을 세워주는 상태로 마무리했다.

해방 이전부터 반탁은 열강들의 국제공동관리론이 제기될 때마다 독립운동의 연장에서 표명돼왔다.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라는 외세의 개입에 한국인은 좌우 할 것 없이 반탁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풍향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1946년 1월3일 조선공산당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외세 대 한국인이라는 구도가 ‘우=반탁 대 좌=찬탁’이라는 대립 구도로 나뉘었다. 이 분열은 ‘반탁=반소·반공=애국 대 찬탁=친소·친공=매국’으로 규정되면서 좌우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분단으로 고착됐다. 1946년부터 좌우 대립은 ‘골육상쟁’ 수준으로 치달았다. 그 끝자락에 1947년 ‘6·23 반탁시위’로 시작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이승만·김구의 실패한 반탁운동
❹‘극우’인 김구가 주도한 조선인 군중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덕수궁 (대한)문을 기습했다. 군중은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기 전에 소련영사관으로 진격했다. 1947년 6월23일 A. M 블룸필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❹‘극우’인 김구가 주도한 조선인 군중이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덕수궁 (대한)문을 기습했다. 군중은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기 전에 소련영사관으로 진격했다. 1947년 6월23일 A. M 블룸필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사진❹는 서윤복 일행 환영대회가 열렸던 중앙청에서 가까운 덕수궁 대한문 앞 상황을 포착한 것이다. 덕수궁에서는 1947년 5월21일부터 제2차 미소공위가 진행되고 있었고, 6월23일은 미소공위 협의에 참여할 정당과 사회단체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이었다. 청원서를 첨부할 때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목적을 지지하고 한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미소공위 결의와 신탁통치안에 협력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첨부해야 했다. 이승만과 김구가 1년6개월 동안 주도해왔던 ‘반탁운동’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실제 그동안 이승만과 함께했던 한민당도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소공위 참여를 결정했고, 김구의 한국독립당 내에서도 안재홍 등이 미소공위 참여를 주장하며 이탈했다.

그래서 이승만과 김구가 조직한 것이 6·23 반탁시위였다. 서윤복 환영대회에 참여하는 인파를 반탁 데모의 파도로 동원하려 했다. 일찍부터 스포츠를 자신의 정치와 외교에 능수능란하게 활용해오던 이승만이었다. 그는 임영신을 통해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출전한 서윤복 선수 일행을 응원하는 기민함을 보여줬고, 실제 서윤복이 우승하자 이를 이승만 외교의 승리로 국내외에 선전하며 이용했다.

반탁시위의 선봉은 전국학생총연맹이 맡았다. 반탁시위 현장에서 미군 사진병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교복 입은 남녀 학생들이 적잖게 보인다. 학생 시위대는 미소공위 소련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미군정의 평가에 따르면, 환영 인파를 반탁시위 군중으로 동원하려는 이승만과 김구의 시도는 실패했다.

반탁시위의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제2차 미소공위는 결렬로 치달았다. 결렬 직후 7월19일 여운형이 암살당했고, 좌우합작 운동은 사실상 해체됐다. 미국도 신탁통치를 통한 독립 경로를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미소공위에서 유엔 총회로 이관하는 방침을 세웠다.

끝난 듯, 끝나지 않은 신탁 파동

한국 신탁통치 장치는 이렇게 최종 폐기됐다. 이리 보면 한국 역사박물관에나 전시될 만한 화석 같은 것이고, 굳이 지금 떠올릴 이유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신탁통치 파동은 1945년 말과 1946년 벽두라는 짧은 시간에 국한되지 않았다. 정부 수립 전까지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쩌면 남북과 함께 좌우 분단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 파동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때보다 종전의 기대가 높아지는 지금, 다시 신탁통치 파동을 떠올리는 이유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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