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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라 그리고 설득하라

전업엄마 10년차가 컬링 스톤 밀며 말하는 삶의 품위…

새롭게 늙어보리
등록 2017-12-30 23:34 수정 2020-05-03 04:28
컬링 선수들이 조심스럽게 스톤을 밀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컬링 선수들이 조심스럽게 스톤을 밀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내 나이 마흔은 까만 비닐봉지와 함께 시작됐다.

그해 겨울 눈이 오지게도 내렸다. 엄지발가락에 금이 간 나는 반 깁스한 오른발을 봉지에 넣고 음식물쓰레기봉투 묶듯이 단단하되 풀어지기 좋은 모양으로 봉한 뒤 아이를 앞세워 집을 나섰다. 그리고 컬링 선수가 스톤 밀듯 최대한의 집중력과 조절력을 발휘해 오른발을 밀며 눈길을 헤쳐나갔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이 천릿길이었다. 몇 년 뒤 소치겨울올림픽에서 뒤늦게 눈에 띄어 모두 놀라고 흥미로워했던 그 생소한 스포츠를 내 이웃들은 일찍이 접하며 놀리고 흥미로워했다.

발단은 배우자의 음주 편력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나라 대중미디어계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호러블한 캐릭터인 ‘와잎’은 그래도 제 자식은 챙긴다. 내 남편은 당시 연일 계속된 음주와 새벽 귀가로 자식의 플라스틱 변기를 마누라가 차서 날리게 한 장본인이다. 우리 집 아동용품 중 유일하게 10만원 넘는 고가의 유아변기는 난데없는 변고에도 무사했으나(심지어 박수진 기자의 두 자녀가 대를 이어 사용 중) 마누라의 엄지발가락은 그대로 퉁퉁 부어버렸다. 다음날 동네 정형외과의 방사선 기사는 나에게 실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냉동실에 있던 떡 덩어리라도 떨어졌나봐요”라고 뭐라 설명할 길 없는 사고 과정을 앞장서 깔끔하게 정리해주었고, 밤사이 일어난 일을 모르는 아이는 그 뒤 냉장고 문짝 트라우마가 생겼다. 남편은 그길로 술을 끊지는 않았으나 늘 조마조마하고 초조한 자세로 술을 마셨다. 너의 사회생활은 나의 기회비용까지 얹어서 하는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마누라의 살신성인적 가르침 덕이 아니라, 다음번에 날아갈 것은 유아변기만이 아닐 거라는 본능적 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사연은 다음 기회에).

여유 있는 삶을 위해 선택한 전업엄마 생활 10년째다. 멸치를 볶으며 잡내를 제거하기 위해 붓는 소주를 개량잔에 넉넉히 따라 멸치볶음 한 모금, 나 한 모금의 경지에 이르는 시기다. 비교적 늦게 낳아 할머니가 손주 보듯 대충 굴리면서 키웠던 아이는 “엄마는 멸치를 볶다보니 소주가 남아서 마셔? 아니면 소주를 마시기 위해 멸치를 볶아?”라는 민감한 질문을 던지는 틴에이저가 된다. 그동안은 아이의 건강과 안전만 챙기면 되었으나, 이제는 본보기랄까 귀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품위 있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

품위 있는 엄마이니만큼 삶의 품위를 세 마디로 요약하겠다. 미리 해두는 유언이라 해도 좋다.

1. 남자한테는 무조건 멋있다고 해라. 음…, 그래. 되도록 멋있다고 해라.

2. 반드시 있다, 바닥에는. 남은 면발이.

3. 거절하거나 설득하지 못하는 관계는 좋은 관계가 아니다.

1번은 학교에서 너의 남자 짝을 떠올려보면 쉽다. 2번. 국물을 신중히 잘 따르면 더 건져먹을 게 있단 얘기다. 대신 그만큼의 지혜와 노동이 필요하다. 3번.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일방적으로 맞춰주거나 부릴 수 없다. 친구는 물론 연인, 부부,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그렇다.

이 말 그대로 길윤형 편집장에게 설득당했다(신입사원 시절부터 여자에게는 무조건 예쁘다고 하던 분이다). 당신은 반드시 쓸 것이 있다고 했다. 옆자리 동료였던 우리는 서로 늘 거절만 하는 관계였다고 했다.

독자 박근노씨는 반년 전인 제1167호 독자인터뷰에서 “기존 독자들과 늙어갈 것인가, 새로운 독자를 찾을 것인가” 물었다. 어쩌면 을 만드는 이들과 보는 이들 모두에게 던진 질문일 것이다. 기자보다 독자로 살아온 시간이 더 긴 지금, 나는 ‘독자적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새롭게, 늙어보리.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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