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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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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종점의 히어로를 위하여

쓸쓸하게, 리드미컬하게, 느낌 있게 김선식 기자의 ‘마포종점 가요제’ 예선 도전기
등록 2016-10-08 17:43 수정 2020-05-03 04:28
류정화 제공

류정화 제공

어느 팝송의 노랫말처럼 그 사건은 ‘부엌에 날아든 한 마리의 새’와 같았다. 내 마음 속 ‘물건을 부수고 문과 창문에 부딪히며’ 내 생활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발단은 지난 9월8일 저녁에 날아온 와이프의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매니저의 선곡은 </font></font>

“근데 진지하게 부탁이 있어.”

“뭔데?”

“나 만삭 부인이니까 들어줄 거라고 생각해. 행운이(10월 출생 예정인 둘째의 태명)를 위해서라도. 들어줄 거지?”

“응, 그러지 뭐.”

“9월 말에 마포종점 가요제가 열려. 여기 출전해줘.”

“;;;;;;;;;;;;;;;;;;;;;;;;;;;;;; 만나서 다시 얘기하자.”

이때까지만 해도, 조만간 까맣게 잊힐 그렇고 그런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와이프는 틈만 나면 마포종점 가요제 얘기를 꺼냈다. “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 웃겨. 여기 나가면 한 3년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던 어느 날, 농담 아니라는 듯 나를 지칭하는 카카오톡 대화명을 ‘마포종점의 히어로’로 바꿨다. 나(마포종점의 히어로)와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눌 때마다 와이프는 가요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 나가야 되나?’

와이프는 일찌감치 참가곡을 정했다. 김건모의 이었다. “마포종점 가요제인 만큼 트로트 필(느낌)이 나야 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트로트 곡을 부르면 너무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MBC 가요 프로그램 에서 9연승을 달성한 ‘우리동네 음악대장’처럼 심수봉의 를 불러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마포종점의 히어로’의 진지한 매니저인 와이프(이하 매니저)에게 그런 흰소리는 통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어느 날 가사를 A4용지에 출력해 왔다. 그러곤 구절마다 주안점을 적어 왔다. ‘쓸쓸하게’ ‘리드미컬하게’ ‘느낌 있게’ 등이 적혀 있었다. 세게 소리 질러 불러야 할 구절엔 강세 표시를 해두었다. ‘우리동네 음악대장’이 그렇게 적어놓고 연습하는 걸 봤다고 했다.

난 ‘리드미컬하게’와 ‘느낌 있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묻진 않았다. 그 대신 “이렇게 가요제에 대해 즐겁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아니겠느냐”고 운을 띄웠다. 대답 대신 코웃음이 돌아왔다.

예선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정작 노래 연습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연습은 내 스스로 예선 참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난 마지막까지 ‘현실 부정’과 ‘미약한 현실 인식’ 사이를 오갔다. ‘설마 진짜 끝까지 나가라고 하진 않겠지?’ ‘혹시 모르니 가사라도 외워둬야 하지 않을까?’

9월20일 화요일 밤, 난 처음으로 연습 무대에 섰다. 무대는 안방이었다. 스마트폰으로 반주 음악을 틀었다. 생각보다 고음이 많은 노래였다. 목이 좀처럼 트이질 않았다. 다섯 번 정도 부르곤 지쳐 잠들었다.

결국 예선 전날이던 9월24일 토요일 밤에야, 나는 홀로 동네 노래방으로 향했다. 왠지 ‘생목’이 아닌 ‘마이크 감’을 익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옆집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노래에만 온 힘을 짜내는 감각도 느껴봐야 했다. 노래방 주인에게 30분만 부르겠다고 했지만, 결국 30분을 추가하고 말았다. 전화 연결을 통해 매니저에게 ‘이 노래()나 저 노래()는 어떠냐’고 들려줬지만, 역시 참가곡은 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래방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 앞 2차선 도로 위엔 ‘마포종점 가요제’를 홍보하는 자줏빛 현수막 대여섯 개가 펄럭이고 있었다.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터벅터벅 걷던 내 마음에도 희미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나 왜 설레지?’

9월25일 일요일 오후 12시30분, 두 살배기 아들은 아빠의 마음을 몰랐다. 아들은 행사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무심히 잠들었다. ‘마포종점 가요제’ 예선이 열리는 서울 도화동 ‘복사꽃어린이공원’엔 이미 무대 설치가 끝났다. 무대 앞 플라스틱 의자 객석 50개가량엔 이미 절반이 들어찼다.

우린 공원 가장자리에 돗자리를 펴고 아이를 눕혀 재웠다. 다른 참가자들도 공원 가장자리에 있었다. 유모차를 옆에 세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는 젊은 아빠, 화단 앞에서 파전에 막걸리잔을 주고받는 중년 여성들, 등산복 차림에 이어폰을 끼고 가사를 외우는 중년 남성, 공원 옆 문 닫은 상점 앞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며 노래를 연습하는 청년.

<font size="4"><font color="#C21A1A">‘그런데 왜 설레지?’ </font></font>
위부터 ‘마포종점 가요제’가 열린 복사꽃어린이공원 입구, 심사위원석, 참가번호 62번 김선식 기자의 무대. 류정화 제공

위부터 ‘마포종점 가요제’가 열린 복사꽃어린이공원 입구, 심사위원석, 참가번호 62번 김선식 기자의 무대. 류정화 제공

먼저 접수처 천막으로 가서 출석 확인을 했다. 내 바로 앞에 줄 선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는 경기도 안산 상록구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9번째 순서라는 말을 듣곤, “아이코 너무 앞이네. 큰일 났네”라고 말했다. 그도 벌써부터 떨리는 모양이었다. 난 참가번호 62번이었다. 이날 예선 참가자는 총 82명이었다.

‘개그맨이자 아나운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시간 관계상 참가자는 노래 1절만 부르며, 본선 진출자는 추후 개별 통보하겠다’는 공지사항을 알렸다. 이어 심사위원을 소개했다. 가수, 작곡가, 작곡가 겸 교수, 그리고 ‘한평생 음악으로 살아오신’ 도화동상인회의 한 고문까지 총 4명이었다.

그들은 심사 기준을 설명했다. “곡이 가진 예술성을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가수로서) 활동할 여건이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마포종점 가요제’ 대상 수상자는 상금 100만원과 함께 한국가수협회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가요제를 주최한 도화상점가연합회장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예전 청량리에서 출발한 전차가 내리는 종점이 바로 마포종점이었습니다. 이 공원이 바로 그곳입니다. 은방울자매의 도 이곳을 배경으로 한 노래입니다. 올해 6회째를 맞은 마포종점 가요제는 그런 마포종점을 기리기 위한 가요제입니다.”

드디어 첫 번째 참가자가 무대로 나왔다. 20~30대로 보이는 혼성 듀엣이었다. 그들은 뮤지컬 공연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연기하듯 라는 뮤지컬곡을 불렀다.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렇게 수준 높은 가요제였어?” “그러게….” 매니저도 놀란 표정이었다.

‘중절모’ 할아버지는 예정보다 더 일찍 무대에 올랐다. 지각한 다른 참가자들 때문이었다. 그는 이란 제목의 트로트 곡을 불렀다. ‘가수처럼’ 잘 부른 노래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객석에선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도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나도 모르게 나온 애드리브 </font></font>

늦게 도착해 순서가 지난 참가자들을 도착 즉시 무대에 올리겠다고 사회자는 말했다. 객석에서 한 중년 여성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섰다. “늦게 온 사람들은 다 끝나고 마지막에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왜 시간 맞춰서 온 사람들이 기다려야 합니까?” 예선 진행에 관한 참가자의 자유발언이었다. 사회자는 “일찍 오신 분들 중에 바빠서 먼저 하셔야 하는 분은 기회를 드리겠다”며 장내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예선 초반, 예상치 못한 난감한 상황이 닥쳤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아빠’가 내 참가곡과 같은 김건모의 을 불렀다. 그는 나보다 목청이 좋은 것 같았다. 매니저에게 “선곡 실패 아니냐”라고 따졌다. 매니저는 “왜 다들 이 노래를 부르겠나. 그만큼 적절한 선곡이라는 뜻”이라고 응수했다.

다른 참가자의 을 듣고 있다보니 긴장감이 몰려왔다. 공원 한쪽 천막에 가서 막걸리 한 병을 사서 종이컵에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매니저는 술 취해서 노래를 끝까지 못 부르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예선 중반, 또 다른 참가자도 김건모의 을 불렀다. 심지어 그는 노래를 편곡해 왔다. 그는 간주 부분에서 편곡한 보컬 애드리브를 선보이려 했지만, 반주가 끊겼다. 노래는 1절까지만 불러야 했다. 무척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참가자 중엔 편곡해 오거나, 노래 잘하는 ‘가수’들, 특히 청년이 많았다. 난 그들의 노래 실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매니저는 ‘보컬’로 승부하긴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우린 이 가요제가 ‘지역 기반’ 축제라는 점, 그리고 심사위원 중 1명이 도화동상인회 관계자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와 동네 주민들을 적극 공략하기로 했다. ‘그래, 처음 인사말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자.’

드디어 참가번호 62번, 내 차례가 돌아왔다. 매니저에게 선글라스를 빌려 썼다. 무대에 오르기 전, 음향감독에게 반주는 인사말이 끝나면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저는 도화동에 살고 공덕동에 있는 회사를 다니며, 도화동과 공덕동에서 매일 밥과 술을 먹는 김선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사회자가 애드리브로 인사말을 살려줬다. “아, 네~ 마포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분이군요. 참가곡은 김건모의 입니다!”

난 선글라스 뒤에서 눈을 질끈 감고 힘, 감정, 소리를 최대한 끌어올려보았다. ‘텅 빈 방 안에 누워~’ 구절은 쓸쓸하게, ‘한잔 주거니 받거니~’ 구절은 리드미컬하게, ‘이 밤이 가는구나~’ 구절은 느낌 있게 부르려 애썼다. 문득 약간의 퍼포먼스가 필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잔 주거니 받거니~’ 구절에서 즉흥적으로 왼손을 리드미컬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빼는 동작을 반복했다.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font size="4"><font color="#C21A1A">눈 주위에 흐른 건 땀인가 눈물인가 </font></font>

노래를 마치자, 질끈 감고 있었던 눈 주위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로 젖어 있었다. 무대를 내려갈 때, 사회자는 한 번 더 애드리브를 날려주었다. “아, 네~ 이분 오늘도 술 한잔 하실 것 같네요~.”

그날 나는 매니저와 함께 서울 동작구에 있는 노량진수산시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좀 특별한 곳에서 밥과 술을 먹고 싶었다. 이른 저녁부터 소주와 맥주를 섞었다. 온몸에 알코올인지, 설렘인지, 자신감인지 모를 것들이 퍼져나갔다.

아직 마음은 무대에 있었다. 거기엔 낙담하는 참가자도, 독설을 퍼붓는 심사관도 없었다. 단지 나의 무대, 우리의 광장이 있었다. 너무 잘해야 할 것도, 너무 눈치 봐야 할 일도 없었다. 그런 소박한 이유만으로도 그곳에선 누구나 ‘마포종점의 히어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사흘 뒤 도착한 문자메시지 한 통. “아쉽게 본선 진출엔 실패하셨지만….”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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