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아이가 아팠다. 열이 38도가 넘어 어린이집에서 조퇴하고 해열제를 먹였다. 장염이라고 했다. 평소 활기차던 아이는 잘 놀다가도 자꾸 까라졌다. 며칠이 지나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열은 내렸지만 설사는 계속됐다. 새벽 2시. 아이 옆에서 설핏 잠이 들었다가 뒤척임에 눈을 떴다. 주섬주섬 기저귀를 챙기는데 아이의 옷이 축축하다. 소변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묽은 변이 옷이며 이불에 온통 묻어 있었다. 잠이 확 깼다. 상태로 보아 설사를 한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모양이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혼자서 다시 잠들기 위해 엄마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었다.
변으로 범벅이 된 아이를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로 따뜻한 물을 틀어주자 아이가 웃었다. 이른 새벽 아이를 목욕시키고 이불을 걷어서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새 이불을 꺼내 펼쳤다. 아이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주고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아이는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일을 기꺼워하고 있구나. 몇 시간 자지 못해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내 몸의 피곤함보다 아픈 아이에 대한 연민이 먼저구나. 내가 마련해준 포근한 이부자리 안에서 쌔근쌔근 잠든 아이.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 찼다.
나도 아이 옆에 가만히 누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이 순간에 귀찮거나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를 낳기 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을 먼저 떠올렸다. 피곤한 몸으로 아픈 아이를 밤새 돌보는 나 자신을 상상하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희생과 헌신을 견딜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공원에 놀러가면 아이를 데려온 부모들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내 아이 뒤를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이 참 안됐다 싶었다. 좋은 곳에서 마음껏 즐기지도 못하고 아이만 바라보는 것이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온 부모의 얼굴에서 미소를 먼저 본다. 가끔 혼자 공원에 나가 상쾌한 바람을 맞을 때면 아이를 생각했다. 이 바람을 내 아이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행여 아이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주변을 살피고 아이의 표정을 관찰했다. 아이가 웃어야 나도 행복해졌다. 아이가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깔깔거릴 때는 안고 있는 아이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 내 핏줄에게서 느끼는 본능적 모성애인지, 약한 존재를 키우면서 느끼는 자연스러운 보호 본능인지 그 근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엄마는 본능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하는 존재라고, 모든 뒤치다꺼리를 언제나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아이를 키우면서 때때로 경험하는 아주 낯선 감정이 ‘나’라는 한 인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이다. 이제야 비로소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해되고 그동안 겉으로만 공감하는 척해온 많은 일들이 피부에 와닿기 시작했다.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아니 키우지 않았으면 느껴보지 못했을 이 강렬하고 따뜻한 감정을 평생 기억하고 싶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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