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을 보면 소설가 레이철 커스크의 글을 인용한 부분이 나온다. 레이철은 회고록 에서 “어머니가 된 후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는 결코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나’ 또한 진정한 나 자신이 아니었다”고 썼다. 의 저자 스테퍼니 스탈은 이 글을 인용하면서 “어머니로서 우리는 이렇듯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분열된 상태, 이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낳은 뒤 오는 정체성의 혼란은 사춘기에 겪는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처음엔 조금 놀랐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이를 낳으면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오히려 내 존재가 더 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신비롭고 새로웠다. 한 생명을 잉태하는 일, 태아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우는 일, 출산, 그리고 젖을 먹여 아이를 살찌우는 일은 나라는 인간의 ‘확장판’이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존재의 당위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이는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눈물 나는 감정들을 죽기 전에 느껴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24시간 동안 온전히 이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내 몸과 마음을 쏟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이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 지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끝 모를 우울감에 시달렸다. 35년간 살아온 삶의 방식을 한순간에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육아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나라는 인간의 확장판은 이전보다 더 쪼그라든 축소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반복적인 노동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늦은 저녁 아이를 재운 뒤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겨우 앞치마를 벗는 순간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출산을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했지만 동시에 예전의 나는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엔 뮤지션인 남편이 무대에 오른 사진을 보고 질투가 났다. 내 인생은 축소판으로 바뀌고 있는데 남편의 인생만 여전히 확장판인 것 같아 억울했다. 바깥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져가는 내 존재에 대한 불안은 때때로 해고를 당하거나 시험을 망치는 꿈으로 발현됐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행복하다가도 지친 하루를 보낸 뒤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울해졌다. 가끔은 이런 내가 정상의 상태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놓인 수많은 선택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잠시 아이를 떼어놓고 외출하면 해방감과 동시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빨리 복직하고 싶다가도 하루 종일 혼자 남겨질 아이가 못 견디게 측은했다. 그래서 스테퍼니는 어머니로서 ‘분열된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운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혼돈을 나 혼자만 느끼는 건 아니라는 것이고, 안타까운 점은 스테퍼니가 얘기했듯이 이러한 분열은 쉽게 봉합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수 이적의 어머니이기도 한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은 비좁은 집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연탄불을 갈던 전업주부 생활을 회상하며 “육아가 즐거웠다”고 했다. 그러다 셋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순간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선언하고 결국 여성학자가 되었다. 그도 분명 인생 사이사이 어디쯤에선가 분열의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길’을 찾았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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