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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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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쓸 죄책감으로 ‘쌩자연분만’

모성애 콤플렉스로 적극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무통주사’ …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등록 2015-10-10 21:16 수정 2020-05-03 04:28
출산 5일전 노을공원에 갔다.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다. 송채경화

출산 5일전 노을공원에 갔다. 손 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다. 송채경화

출산의 고통은 대체 얼마나 심할 것인가. 그 고통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가늠해 보기 위해 출산 후기들을 폭풍 검색했지만 그럴수록 두려움은 배가 됐다. “진통이 너무 심해서 잠시 기절했어요. 아기가 무사해서 다행이지 정말 나쁜 엄마가 될 뻔했네요.” 얼마나 아프면 기절을 다했을까. 출산의 고통이 몸을 뼈째 잘라내는 고통 다음으로 아프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아이를 낳은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출산의 고통에 대해 캐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대개 비슷했다.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니. 겪어보면 알아.” “블랙홀에 빠진 기분이야. 정신이 없어.” 이런 두루뭉수리한 대답들도 상상력만 자극할 뿐 공포를 잠재우는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출산의 고통에 집착한 이유는 그 흔한 ‘무통 분만’의 기회가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집이 가까워서 선택한 병원의 담당 의사는 하필 무통 분만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무통 주사 진짜 안 놓아주시나요?”라는 소심한 질문에 담당의는 마뜩찮은 표정으로 거의 20분을 할애하며 왜 무통 분만을 권하지 않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의 핵심은 “출산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것을 겪는 것이 산모와 아기에게 가장 좋다. 출산의 고통은 아이와의 애착 관계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의사는 한번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같은 설명을 여러번 반복했다. 겨우 한마디의 질문을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나는 아기의 건강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느낄 고통에만 집착하는 초라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의사의 설교를 듣는 동안에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가 병원에서 나오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아니, 무통 분만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다 모성애가 없다는 거야?”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해봤지만 그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남편은 남의 편이라더니. “병원을 바꿀까?”라는 의견에도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산모와 아기에게 좋다는데 그냥 무통 없이 낳자는 거다. 내 건강을 고려한 것이라는 남편의 설명에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기가 겪을 고통이 아니라고 저렇게 쉽게 얘기하다니. 그렇다. 의사와 남편은 둘다 출산의 고통을 영원히 느낄 일이 없는 ‘남자 사람’이 아니던가.

사실 무통 주사를 맞느냐의 여부는 의사도 남편도 아닌, 아이를 직접 낳는 내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선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무통 주사를 포함해 인위적인 의료 행위를 일체 하지 않는 자연주의 출산이 유행이라지만 나는 애초에 그럴 마음이 없었다. 특히 무통 주사의 경우 아이에게 해롭다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그 엄청난 고통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담당의도 과학적인 근거를 들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무통 주사와 모성애는 상관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랬으면서도 결국 난 무통을 선택하지 못했다. 새로운 병원을 찾는 것도 성가신 일이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몹쓸 죄책감이 나를 옥죄었다. 의사의 설명을 안 들었으면 몰라도 면전에서 직접 들은 뒤에도 무통을 하겠다고 고집을 피울 강단이 나에겐 없었다. 그놈의 모성애 컴플렉스가 뭔지.

등떠밀리다시피 결정된 ‘쌩자연분만’은 임신 후기에 큰 스트레스를 줬다. 분만시 통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는 라마즈 호흡법을 연습하는 것도 마음의 평정을 찾는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출산은 어땠냐고? 지금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무통 분만이다.

송채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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