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유품은 ‘일인칭 복수형’으로 말을 한다. 김숨의 여덟 번째 장편소설 [L의 운동화](민음사 펴냄)의 실질적 화자 ‘L의 운동화’도 그렇다. 이 운동화는 1987년 6월9일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던 그날 신고 있던 신발이다.
미술작품 복원가인 ‘나’는 L의 운동화를 복원 대상으로 만난다. L이 숨을 거둔 87년 7월5일 이후에도 남아 있던,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그러니까 L이 없는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 있는, 그의 운동화. “사람으로 치면 몸속 장기들이 망가져 약물 처방조차 함부로 내릴 수 없는 상태”로 “만신창이가 된” 채 “밑창을 위로 향하고” 있는 오른짝 운동화.
‘나’는 고심한다. 최대한 복원할 것인가, 최소한의 보존 처리만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둘 것인가, 레플리카(사본)를 만들 것인가. 작품 복원에선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 일 역시 복원에 속한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복원이 거느리는 의미는 간결하다. ‘치료’. 대상을 되살리면서 대상이 견딘 시간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치료로서의 복원이다. 김숨은 ‘나’가 복원하는 이한열의 운동화를 통해 국가폭력에 저항하던 목소리를 되살려낸다. 2015년 이한열 28주기에 미술품 복원 전문가 김겸 박사는 이한열의 270mm 흰색 ‘타이거’ 운동화를 복원했고, 김숨은 이 과정을 소설화했다.
자신의 피 4.5리터(사람의 총혈액량)를 응고시켜 만든 혈두상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도입부터 강렬하다. 영국 아티스트 마크 퀸(52)의 ‘오직 붉은’ 자화상 얘기다. 그의 자화상은 냉동고 전원이 꺼지는 순간 훼손되며 복원은 불가능하다. “생명의 나약함과 유한성”이 현대미술의 한편에선 직관적, 극단적으로 표현된다.
여기서부터 플롯은 반걸음씩 나아가고, 감도는 반스푼씩 진해진다. 한걸음, 한술도 많다는 듯 야무지게 걷고 섬세하게 기운을 뿌림으로써 풍성해지는 ‘김숨체’는 훼손과 복원을 다루는 이 소설에서 각별히 더 아름답다. “작업하는 시간보다 지켜보는 시간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긴” 것이 복원이라고 한다. 일지 형식으로도 읽히는 이 소설의 한 장은 복원실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무언갈 하는 시간보다 길다는 한마디가 전부다. 이한열 운동화의 복원을 복원하는 이 소설이 그럼에도 낙낙할 틈이 없는 건 김숨의 문체 때문이다.
L이 묶은 운동화 끈을 푸느냐 마느냐. 운동화 형태를 잡아주기 위해 내부 보형물을 만드는 ‘나’는 이 문제에 부닥친다. 복원가도 복원할 수 없는 것은 사물의 주인이 직접 만들어놓은 고유한 패턴이다. ‘나’는 운동화 끈을 풀지 않기로 한다. “군화 끈도 저렇게까지 묶지는 않”았을 듯한 L의 끈에서 “앞볼이 꽉 조이게 끈을 매고 묶”는 몸짓이 되살아난다. 소설엔 ‘이한열’이란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이한열의 피, 시위대의 땀, 시위대를 향해 터진 최루가스를 묻히고 있는 L의 운동화는 그래서, 이한열이란 일인칭의 복수형이 된다. L이 발화한다. 끈이 풀어지면 안 된다고.
L의 끈은 복원할 수 없고 어쩌면 그럴 필요도 없다. 이건 훼손되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28년 동안 100조각 난 밑창을 이고 뒤집어진 채 보존됐던 운동화 바닥을 복원한 뒤 똑바로 세웠을 때 모두가 본 것이, 끈이다.
석진희 교열팀 기자 ninano@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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